위대한 발견100

위대한 발견 - 모순된 자아 발견

true2020 2022. 8. 24. 11:06

▶ 無矛盾性의 원리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A이다"와 "A는 아니다"라는 것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 또는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원리를 일컫는 논리학 용어이다.

 

 矛盾性

*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상반된 목적

* 선악의 양면의 지향성

* 모순(矛盾)은 두 개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 선악, 유무, 動靜

 

▣ 원리강론 2

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에 반하여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상반된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인간의 矛盾性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 모순성을 갖게 될 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되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矛盾性을 內包하고서 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내포한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 상태를 일러 기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한다.

 

▣ 원리강론 242

원래 인간 시조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만을 대하고 사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서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탄도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타락 직후 아직 원죄만이 있었을 뿐 다른 어떠한 선행도 악행도 하지 않았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의 후손들도 역시 이와 같은 中間 位置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1. 몸과 마음의 싸움

 

1)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로마서  7장 바울의 개탄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My inner being delights in the law of God.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But i see a different law at work in my body - a law that fights against the law which my mind approves of. It makes me a prisoner to the law of sin which is at work in my body.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What an unhappy man i am! Who willrescue me from this body that is taking me to death?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Thanks be to God, who does this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is then, is my condition; on my own I can serve God^s law only with my mind.

While my human nature serves the law of sin.

 

2) 사람은 선악의 모체

 

▣ 1972.2.4(금)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이상 세계. 링컨센터.

- 미국 7대 도시 순회강연.

 

053-010 어제저녁 여기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개인은 상반되는 두 가지 목적의 방향을 가진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은 선한 곳으로 가기를 원하는데 몸뚱이는 그 반대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틀림없이 마음과 몸이 합해져서 되어진 나인데 이 둘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 즉 그러한 남자와 그러한 여자가 합하면 가정이 됩니다. 그런데 속사람과 겉사람이 있기 때문에 두 부부가 만나면 네 사람의 형이 벌어져 결개의 다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면 이러한 인간들을 그냥 버려 둘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모르는 역사의 배후에서 활동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반면 우리 인간을 악으로 몰아넣은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도 하나님이 끌어가는 방향의 반향으로 끌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아무리 반대하는 사탄이 있다 하더라도 사탄에게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세워 놓은 원칙을 반대하고 나설 수 있는 권한은 없는 것입니다.

 

옳은 것은 하나님이 관리하는 것이요 나쁜 것은 사탄이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의 결과가 어디에 미쳐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에도 물론 그렇겠지만 우리 개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악의 모체가 될 수도 있고 선의 모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사람은 선의 출발지가 되는 동시에 악의 출발지도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 외적인 몸을 중심 삼은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을 배반하여 나오는 역사의 결과.

 

▣ 1968.6.9(일) 전본부교회. 선의 결실을 거두라.

020-179 본래는 인간의 마음과 몸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 안팎으로 모순이나 상충 또는 투쟁이 없는 결과를 빚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사탄을 중심 삼고 외적인 사랑을 한 것이 동기가 되어 몸과 마음이 상충된 입장에서 투쟁하는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몸을 중심 삼은 사랑이 내적인 마음을 중심 삼고 이상적인 영원한 생명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여 나오는 역사의 결과가 빚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외적인 사랑 즉 사탄의 사랑을 제거하고 거기에 본연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받아서 몸과 마음을 규합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기서부터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2. 모순된 자아발견, 이게 위대한 발견.

 

1) 본심과 사심의 두 마음

- 성서를 중심한 종교의 위대한 공헌: 타락했기 때문이다. 

2) 타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3) 사도 바울 "누가 나를 해방해 주겠느냐" 

 

 1987.1.11(일) 미국. 신의 섭리 노정과 인간의 생활 노정.

061-111 나에게는 본심의 생각이 있고 본심에 반항하는 타락성의 생각, 이 두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예요. 어째서 인간에게 두 마음이 있게 되었느냐? 이건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마음이 두 마음인 것을 볼 때 근본이 두 마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타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오늘날 종교라는 것이 나와 가지고 위대한 공헌을 한 것이 뭐냐? 특히 기독교를 중심 한 성경이 나와 가지고 위대한 공헌을 한 것이 뭐냐 하면 이와 같은 두 생각 가운데서 고민하는 인간 앞에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또 다른 이런 마음이 생겼다고 한 거예요. 이것은 놀라운 發見입니다. 그 개념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종교로부터 왔습니다. 종교는 어디서부터? 신으로부터 왔다 이것입니다.

 

오늘날 일반 사람들이 그걸 모르니 타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사실, 타락이라는 것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무섭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섭리 노정의 길을 거쳐 왔는가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라구요. 우리 인류 시조가 타락했어요. 그때부터 타락의 습관이라는 것이 우리 육신의 혈통을 통해서 고질화되어 50억 인류로 번식될 때까지 따라 나왔다 이거예요. 그것이 높다면 히말라야 산보다 높고 황폐하다면 사하라 사막보다 더 하고 대양이라면 태평양보다도 넓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 습관적인 짊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도 안 해요.

 

그 짐을 벗을 수 있고 그 길을 돌파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을 주고라도···. 돈이 있으면 돈을 다 주고라도 또 값진 무슨 보물이 있다면 보물을 다 주고라도 벗어야 할 짐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통일교회 식구된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그런 짐을 내가 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이런 짐에 눌려 있고 포위된 내 가운데 본성이라는 본심이 있어 가지고 점령당하지 않고 어느 때든지 그 밑에서 솟구쳐 머리를 들고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 사도 바울 같은 양반도 그러지 않았어요?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몸은 이 세상의 罪惡의 法을 따른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구 이 싸움터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리요" 하고 嘆息했다구요. 누가 나를 解放시켜 주느냐 이거예요. 그 본심의 사람은 해방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해방해 주겠느냐 이것입니다.  그 본심의 사람은 해방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사랑하지요? 나를 사랑하지요? 자기를 사랑하지요? 자기를 사랑한다는 그것은 두 사람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심 삼고서냐, 이걸 생각해야 됩니다. 고착되어 있는 이것을 저나라에 가더라도 떼어 버려야 됩니다. 언젠가는 떼어 버려야 돼요. 청산지어야 됩니다. 언제라도.

 

이것이 이 땅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땅에서 청산해야 됩니다. 저나라에서는 청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몸뚱이가 움직이겠어요? 못 움직이는 거예요. 그렇게 큰 죄악의 내가···.

 

영계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천국을 알고 직접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긴 가야 할 텐데 못 가는 신세라구요. 그 초라함과 비참함이 얼마나 크겠어요? 세상의 어떠한 비참함보다도, 역사시대의 어떤 누구의 비참함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자아를 발견하는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거예요. 알겠어요?

 

* 종교는 고행길을 가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좋아하는 것은 발로 차 버려라 이거예요. 육적인 눈이 좋아하는 대로 가다 보면 마음적 눈은 싫어하는 거예요. 전부 반대예요.

 

가만히 생각하면 말이에요, 인간이 矛盾된 存在라고 생각하는 것도 墮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순된 자아 발견, 이게 위대한 발견이라는 거예요. 이게 역사에 있어서 어떠한 발견보다도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돼요

 

타락이 어떻게 됐는지 안다고 하면 그것이 보다 놀라운 것입니다. 이 혼돈 가운데서 어떻게 해방된다는 길이 있다면 무슨 犧牲을 치르더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이 가야 할 책임 노정입니다. 

 

3.  선악의 모체.

 

▣ 1957.11.10(일) 전본부교회. 하나님의 능력은 한마음과 한뜻이 이루어진 곳에 나타난다.

003-223 자신이 두 갈래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모순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여러분은 여러분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형제를 반대하지 말고 그와 하나 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 타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사탄은 무엇이뇨? 하늘과 우리와의 마음을 떼어놓은 것이 사탄입니다.

 

1) 인간에게 선한 요소와 악한 요소가 있다는 것은 문제다.

 

 1971.1.8(금) 춘천교회. 인생의 갈 길.

038-301 우리 인간 자체를 가만히 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요소도 있고 악한 요소도 있는데,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한 개체를 두고 보면 몸이라는 것도 있고 마음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과 마음이 언제나 화목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이렇게 가지고 하는데 몸뚱이는 저렇게 가자고 합니다.

 

* 마음이 가자고 하는 곳으로 가면 타락한 오늘날의 우리 인간 세상과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요, 몸뚱이가 가자는 곳으로 가면 타락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무엇을 먹여 주면 더 잘 먹여 달라고 하고 놀려 주면 더 잘 놀려 달라고 하며 남의 것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자기 위주로 하여 나만이 제일이라는 식입니다. 남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몸과 반대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명령합니다. "남을 위해 살아라.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라. 못 사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줘라. 공적인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몸을 바쳐라. 몸을 희생시켜라" 하면서 마음은 항상 몸과는 다른 방행으로 지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고민하게 됩니다. 인생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는 거예요. 몸은 이렇게 가려하고 마음은 저렇게 가려하는 가운데서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 악이 교육이 필요한가요, 필요하지 않은가요? 악하게 만드는 데는 교육이 필요 없습니다.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 자연히 악한 사람이 됩니다.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하면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돼요, 안 돼요? 선한 사람이 되려고는 생각지도 못합니다. 틀림없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4. 타락했다는 그 자체를 두고 볼 때 신이 있다는 것을 가능케 하고 우리 자체가 떨어졌다는, 고장났다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거예요.

 

▣  1977.10.9(일) 벨베디아. 통일의 근핵.

094-277 그래서 철학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이론 추구를 해 나가다가 이제는 포기 상태에 들어왔다 이거예요. 종교는 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 가지고 거기에 투신해 왔지만 그것도 확실히 발견하지 못한 채 머물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인간만이 신을 필요로 하느냐, 신도 인간을 필요로 하느냐 이거예요.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함과 동시에 신도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고는 상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의 이상과 인간의 이상을 공동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거예요. 신의 사랑에다 인간의 사랑을 공동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나온다구요.

 

만일 신이 있다면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이냐? 이게 문제라구요. 또 신이 있다면 우리 인간은 신을 대해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이냐? 그것이 공통된 것이 아니고는 안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신에 대한 관념과 신에 대한 인식과 신에 대한 발견도 필요하겠지만 신과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된다구요. 

 

자, 이렇게 볼 때 그게 무엇이겠느냐? 신에게 인간을 필요로 하는 지식이 필요하며 돈이 필요하며 무슨 권력이 필요하겠느냐? 우리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신에게는 필요 없다구요. 여기서 신과 인간의 공통적을 발견해야 된다는 문제가 벌어진다구요.

 

만약에 신이 있다고 한다면 서로서로가 지닐 수 있는 그런 공통점이 어떻게 돼서 연결 안 되고 이런 결과가 되었느냐? 연결 안 되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 이런 문제가 문제된다구요.  

 

그래서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이 뭐냐? 우리 인간이 모순된 자체임을 부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건 절대적이다 이거예요. 이건 진리요 사실이다 이거예요.

 

자, 그러면 신의 공통점과 인간의 공통점이 어디서 연결돼야 되느냐? 만약에 이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디에서부터 연결될 수 있느냐? 이것이 연결될 수 있는 그 기준이 어디냐 이거예요.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이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과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성사하지 못한 연고로 그 공통점에 도달하지 못한, 이러한 공통점에 합격할 수 없는 모순된 존재가 되었다 이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인간 자체가 모순된 자체라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이것이 어느 기준에 미달하고 고장났든가 떨어졌다는 이런 관념을 도입하면 신은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타락이라는 말이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 모른다구요. 타락되었기 때문에 모순된 이런 입장에 섰다는 것을, 타락했다는 그 자체를 두고 볼 때 신이 있다는 것을 가능케 하고 우리 자체가 떨어졌다는, 고장났다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거예요.

 

우리가 타락되었으니까 모순될 수밖에 없고, 우리가 모순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은 모순된 우리와 공통된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론이 맞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추구에서 신의 존재성을 확정지을 수 있다구요. 신이 있다!

 

5. 단 하나 소유로 남을 수 있는 재산이 무엇이냐?

 "나는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 타락의 한의 자각을 해야 됩니다.

 

 1994.2.1(화) 본부교회. 통일과 우리의 사명.

- 지도자 회의 때.

 

254-037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이냐? 단 하나 소유로 남을 수 있는 재산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알라구요. "나는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타락을 자각하라구요.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 이념을 중심 삼고 아담 해와가 타락한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 위할 수 있으면서 위하고 위하고 투입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상만이 악마를 제거시킬 수 있는 방패라는 것입니다.

 

타락성에 대한 자각, 타락의 한의 자각을 해야 됩니다. 에덴에서 쫓겨나 눈물을 흘린 자신을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간곡하게 부모를 붙들고 하나되기 위한 마음이 사무쳐 가지고 천년만년 죽음의 고개가 있더라도 그것을 넘고 넘고 넘어가겠다는 마음이 앞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몸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찾지 않고는 승리의 패권 기반이 지상 위에 횡적으로 전개되더라도 나하고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 알았다구요? 양심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요. 자기를 위하는 개념을 떠나서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 1959.12.6(일) 전본부교회. 모든 것은 선악의 싸움터를 넘어야 한다.

008-142 우리들은 타락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타락했다는 말을 인정한다면 자기 자신이 어떤 영광의 조건이나 가치적인 무슨 조건을 갖고 있다 하여도 그것 역시 타락권내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신들이 마음으로 혹은 몸으로 느끼는 행복감 혹은 희망에 넘치는 소망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타락권내의 소망이요 타락권내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우리들 자체도 역시 타락권내에 머물러 있는 자체인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 이 타락의 구렁텅이를 메우고 밟고, 넘어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인간이기에, 여러분의 마음은 이 시간도 달리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계시다 할진대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며, 선이 있다 할진대 선의 목적은 무엇이뇨? 역사상의 선한 사람들이 이 땅에 와서 희생을 당하고 간 목적이 무엇이뇨? 달리고 있는 이 인류가 이 고개를 빨리 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그 고개를 넘게 하려니 하나님께서는 선한 개인을 보내서 선한 환경을 개척하게 하시고 선한 이념을 세워 선한 국가 형태를 갖추어서 선한 세계로 이끄시는 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세계는 최후로 하나의 판결을 짓고 넘어가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세계가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우리의 가정이 그러하며 우리들 자신이 그러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 하늘도 다시 넘어가야 할 운명에 있는 때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6. 타락했다는 말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1992.5.10(일) 본부교회. 세계 여성시대 해방 선포.

230-303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느냐? 본래 출발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조주를 중심 삼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하나되었던들 모든 문제의 해결은 거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지금 인류는 하나님이 있어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계는 하나님의 이상을 대표해서 지음 받은 인간이 정착할 기지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돈도 아니요, 지식 혹은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일생 동안 생활의 방편으로 필요한 재료로 생성된 것이지 영원한 인생 노정의 행복의 모체가 될 수 있는 내용은 전혀 아닌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타락이라는 말을 안 갖다 붙이고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맙게도 성경에 인간은 타락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류 세계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복되고 복된 말입니다.

 

타락되었기 때문에, 병이 났기 때문에, 고장이 났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말은 고장나지 않았던, 고장나기 이전의 세계는 오늘날 이와 같은 불신 부패 투쟁 모략중상하는 사회가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운 것은 타락했다는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했다는 말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의 고개를 넘은 내일의 세계에 있어서 희망적 요점을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소개하는 말인 것입니다. 

 

6. 하나님과 사탄, 이원론?

 

▣ 1972.3.6(월) 새로운 메시아와 공식적 역사 섭리. 샌프란시스코 스카티시 라이트 템플.

- 미국 7대 도시 순회 공개강연.

 

053-328 만일에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탄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탄을 왜 제거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탄 마귀가 본래부터 있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한 존재가 횡적으로 들어와서 인간을 타락시킴으로 말미암아 사탄 마귀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있는지 혹은 사탄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일는지 모르겠습니다.

 

*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심각하게 기도를 하게 되면 반드시 방해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있어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반대 작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본래부터 사탄이 생겨났다면 지금까지 6천 년이라는 인류 역사를 중심 삼고 인간을 고통 가운데에 붙잡아 놓은 사탄, 하나님이 구원섭리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구원섭리를 성취하지 못하게 해 온 사탄, 하나님을 반대한 이 사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능숙한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탄이 있다면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이 그 사탄을 이겨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서면 이원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이 두 개가 됩니다. 상반된 목적이 두 개가 되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는 목적으로 간다는 것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이상 세계는 꿈에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사탄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탄은 어떠한 사고로 말미암아 중간에서 횡적으로 투입된 존재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의 하나님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왜 사탄 마귀를 용서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류를 대해서 죄를 법하거든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 그와 같이 죄를 지은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나 용서해 주라고 하면서 왜 사탄은 용서하지 못하느냐? 만일 사탄을 용서해 주고 구원섭리가 끝날 수 있다면 사탄 하나만 구원해 주면 인류는 자동적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관절 이 사탄 마귀라는 존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1990.2.21(수) 선문대학교. 참된 통일과 하나의 세계.

- 참부모님환영대회.

 

199-331 오늘날 기성교회 신학, 현대의 신학은 뭐라고 하느냐? 창조주는 거룩한 분이고 피조물은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사랑의 논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모순된 자체의 환경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다 하면 그건 미친 것들입니다. 그런 종교에 완성이 있을 수 없고 그런 종교에 이상 실현이 있을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절대적인 목적을 갖고 지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 될 수 없다.

 

 1970.12.13(일) 참을 찾아서. 전본부교회.

036-285 여러분들이 생애 노정에서 좋은 것과 관계 맺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과 관계 맺으려면 현재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찬양하고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마음이 원해서 관계 맺고자 하는 것과 몸이 원해서 관계 맺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절대적인 목적을 갖고 지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우리 인간들도 하나의 목적을 중심 삼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이것을 보게 될 때 오늘 우리 인간 자체 내에 각기 다른 두 개의 목적을 추구하는 몸과 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순된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지은 피조물도 하나의 목적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의 목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하나의 목적에 인연을 맺고 일체가 그 목적을 중심 삼고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내 개체에 있어서 제일 가까운 몸과 마음의 상충이 웬 말이냐. 이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찾아가는 목적의 귀착점, 생명과 더불어 영원히 같이하여야 할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귀착점은 반드시 하나의 목적권내에서야만 이루어지는 것이지 두 목적권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절대적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자체 내에 상대적인 권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036-297 오늘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두 목적을 지향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를 부정해야 됩니다. 절대적인 하나의 긍정의 가치를 추구해 나가려면 반드시 하나를 없애야 합니다.

 

▣ 1972.3.20(월) 하나의 하나님과 하나의 세계 종교. 후렌즈 미팅 하우스.

- 영국 3일간 공개강연회.

 

054-100 그러한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이 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은 절대적으로 하나여야 되는 거라구요. 목적이 둘이 되어 이랬다 저랬다 하면 하나님이 이상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하나님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지으셨다면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직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 외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자체를 두고 보면 두 개의 상반된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는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가 이리로 가려고 하면 하나는 저리로 가려고 한다는 거예요.    

 

* 만일 인간이 완성해 가지고 타락했다면 천국에 가서도 완성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완성하기 전에 고장이 나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과로 말하면 다 익어서 주인이 따 가지고 창고에 넣어 관리하기 전에 나무에 달렸을 때 바람이 불었든가 해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익기 전에 떨어졌다면 완성하기 전에 사고가 나거나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시 구할 수도 있고 다시 만들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완성을 바라보고 나가는 과정에서 타락했다고 봐야 되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 앞에 또 다른 주체가 나타났기 때문에 상반되는 거예요.

 

사람을 중심 삼고 볼 때 하나님도 사람이 필요하고 악한 사탄, 악신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두 주인이 근거지로 삼고자 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善物이 惡物이 됐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시기 때문에 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악신은 절대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때로는 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망칠 수 있고 하나님도 망칠 수 있는, 사탄도 못 믿고 하나님도 못 믿을 입장에 선 것이 인간이라는 겁니다.

 

▣ 1972.5.21(일) 완전 복귀. 전본부교회.

057-012 우리 일생에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하나하나 빼낸다면 최후에 남은 것이 선이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소망이지만 선보다는 악이 남기 쉬운 우리 인생의 행로가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시대의 수많은 인류를 종합해 볼 때 개인 개인의 선과 악을 제하고 나면 선보다도 악이 남아진다고 본다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고 또한 이 사회는 선한 사회가 아니라 악한 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 노정을 두고 기나긴 인류사를 관찰해 보더라도 개인 개인이 연결되어서 이루어진 것이 역사인데 그 역사 노정에 있어서 참을 이어받아 가지고 참의 역사가 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참보다는 악이 남아져 가지고 악의 역사가 이어 나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선한 세상이 아니라 악한 세상이라고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게 되었느냐? 선이 먼저 출발해서 선의 씨를 심었더라면 심어진 대로 거두어지므로 선의 결과가 반드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이 심어진 것이 아니라 악이 먼저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악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다면 그건 악만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기 때문에 선한 면과 악한 면이 뒤넘이치면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한 바탕 위에 악이 심어졌기 때문에 최후에 남아지는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 남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전체를 미루어 봐서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의 지배권 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이 전체를 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악할 수밖에 없지만 만일 선한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 절대자는 어떠할 것이냐? 혹은 절대자가 있는 반면에 그 절대자를 반대하는 악한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만은 절대적인 입장에서 선해야 될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도 선해야 되고 과정도 선해야 되고 끝도 선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걸어온 과거도 섭리를 추진시키는 현재도 미래도 그분에게 있어서는 선과 악이 합한 모습이 아니고 혹은 선과 악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선만이 남아지는 것이고 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반대적인 사탄이 있다면 그 사탄은 어떠한 존재냐? 그에게 있어서는 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출발부터 악한 것이요 과정도 악한 것이요 결과도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만일 사탄이 선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이 선한 길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혼선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악은 어디까지나 악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악은 어디까지나 악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작도 끝도 악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