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 ▣ 1956.12.2(일) 전본부교회.

true2020 2021. 7. 18. 11:56

▣ 1956.12.2(일) 하나님의 섭리와 초현실적인 모험성. 전본부교회.

001-263 이제 과거의 우리 선조들을 회고해 봅시다. 먼저 노아의 일생을 보면 평탄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120년 후에 세상을 물로 심판할 것이니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의 노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열이틀도 아니요 십이 년도 아니요, 120년이었으니···. 아라랏산 꼭대기에 방주를 ㅈ으라는 그 말씀은 그때의 현실과는 부합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을 받고 실행해 나가는 노아의 그때의 실정으로 보면 그야말로 미친 사람이요 그 시대에 도저히 부합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명령을 받은 노아는 내적으로 굳은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아닌 120년이란 기간을 꾸준히 한날을 바라보고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노아야말로 1600년 역사 과정에 없었던, 1600년 역사를 대신하여 하늘 앞에 세워진 모험적인 선봉자였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정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야 주관해 주시든 말든 세상 사람들이야 욕을 하든 말든 한번 내리신 명령을 변치 않는 약속의 뜻으로 믿고 나가는 노아에게는 그 모든 조건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뜻을 위해 출발한 기준, 생명을 각오하고 생애를 포기하고 나선 그의 발걸음 앞에는 그 모든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통해 거듭되는 수고의 노정을 말없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런 노아에게는 가정적인 비난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비난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길,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 1600년 역사 과정에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그 길, 오직 천상의 길을 타개하기 위해 나선 노아의 발걸음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노아는 그때의 사회 환경이 가로막고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밀어체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모험적인 사람이었음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자신의 앞길에 어떠한 시험이나 어려움이 닥쳐올지라도 그것을 기필코 헤쳐나갔고 120년이 지난 후에는 아담 가정이 잃어버린 복귀된 하나의 가정을 찾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아의 역사적인 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하나님으로부터 갈대아 우루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든 고향 산천을 뒤로하고 일가친척과 이웃을 다 포기한 채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의 심정은 참으로 막연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기가 지금까지 살던 모든 환경을 초월했습니다. 가정을 초월하여 지금까지 알뜰하게 살아온 살림을 전부 포기하고 보따리를 들고 나섰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걸음은 그야말로 당시의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었는 일이었습니다. 뜻을 두고 느끼는 사람, 뜻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해도 어느 누가 아브라함 편에 서서 "옳소이다. 당신이 가는 길이 지당하오니 어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세상이 알아 주든 몰라 주든 뜻을 대한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영원히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마음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이끄시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때 어떠한 모험이 따르는 태산준령이 가로막고 죽음의 고개가 가로막을지라도 참고 그것들을 뚫고 나갔던 것입니다.

 

001-265 하나님께서 우상장수 데라의 맏아들인 아브라함을 빼앗아 가지고 그런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세움 받은 아브라함은 "이제 내가 가는 길에 내 사랑하는 부모가 붙들어도 사랑하는 친구가 붙들어도 사랑하는 형제가 나를 붙들어도 나의 이 중심은 변할 수 없다"는 확고한 각오를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백 세에 만득자로 얻은 이삭까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그 명령을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의 모험적인 조건이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늘땅을 대신하고 천상의 일이나 지상의 일 등 억천만사를 좌우하는 조건이었는데 이것을 모르면서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그 명령을 받은 후 아들을 제단에 놓고 제사드리려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 삼아 칼을 들어 찌르려 했던 아브라함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적 의식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어느 누가 아브라함의 그런 신앙을 인정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제시한 이 모험적인 행동은 곧 아브라함이 하늘에 속한 몸이고 아브라함의 가족이 하늘에 속한 몸들이니 아브라함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과 그의 모든 물질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번데드리는 과정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아들은 내가 낳았으나 당신 것이오니 당신께 드리겠나이다" 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번제하려 했고 현실적인 환경을 타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새 선조들의 신앙의 중심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야곱 역시 그러했고 모세 역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세우실 때 평탄한 길을 걷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은 출생한 후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빼앗는 싸움을 해야 했고 모세도 나면서부터 싸움의 조건에 걸려 있었습니다.

 

001-266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 땅 원수들의 나라에서 400년 고난을 거치던 때에 하늘이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리하여 바로의 두려운 압정 하에서 3개월 동안 어머니의 보호를 받다가 그 후 바로의 딸에게 붙들림을 받아 궁중에 들어가 40년 생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모세의 바로 궁중에서의 생활이 호화롭고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뜻을 대하는 모세는 애급 궁중에 있었지만 애급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그의 가슴에 사무쳤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40평생 홀로 이스라엘의 자조를 품고 생활하던 모세가 궁중을 나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이 애급 사람 앞에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참으래야 참을 수 없는 의분심이 폭발되어 애급 사람을 때려죽였던 것입니다.

 

그 후 바로 궁중을 나와 가지고 남겨진 이스라엘의 축복의 뜻을 마음에 품고 미디안 목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생활은 편안한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어떤 사람도 그토록 호화로운 바로 궁중을 버리고 목자 생활을 하는 모세를 이해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망하지 않고 하늘을 이한 남 모르는 제단, 이스라엘을 위한 숨은 제단을 쌓아 나갔습니다. 이런 모세였던 연고로 80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을 그를 택하셨고 민족의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는 주인공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