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 1972.6.25(일) 전본부교회.

true2020 2020. 10. 23. 14:01

▣ 1972.6.25(일) 신에 대한 체휼과 우리의 자각. 전본부교회.

058-288 만일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들을 구하려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24시간을 언제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땅 위의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자녀들을 가진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도 자식에 대해서는 24시간 자기가 눈을 뜨고 의식이 있는 한 어제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이상의 어려운 일이 있게 될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언제나 자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도 부모의 심정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미루어서 보게 될 때에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오늘날 인류를 자기의 자녀로서 바라보고 있는 한 그 자녀들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24시간 우리를 위해서 염려하고 계신 하늘이 있다. 그것이 말뿐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하늘과 먼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낄 것입니다.

 

내가 가나 오나 어떠한 행로에 서 있더라도 혹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자리에는 나만 있지 않다, 하늘이 같이 있다, 내가 보고 느끼는 전부 혹은 환경에 있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나만의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는 시선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그런 동감의 시선이 여기에 곁들여 있고 내가 내미는 손길에는 하늘의 동정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기 쉬운 것입니다.

 

보고 느끼고 감각하는 모든 것은 하늘과 주체 대상 관계에 있어서 일체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지로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악한 자리에 나가려야 나갈 순 없을 것입니다. 딴 일을 하려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하늘은 우리 인간을 대해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대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하늘과 더불어 같이하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생활을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불효밖에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되신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찾아오신 그 하나님이 아버지적 사랑을 가지신 주체되신 분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서 염려하고 그분이 염려할까 봐 내 생활을 절제하고 혹은 그분이 고통을 느낄까 봐 내 환경을 정리하면서 수시로 하늘을 위주하고 내 환경적인 모든 것을 상대적 여건으로 일치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느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058-290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하면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이다, 나는 아들이다, 아들인데 둘도 없는 아들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아버지인데 세계의 수많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아버지다" 하는 것입니다.

 

058-291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라구요. 원리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 관계를 중심 삼고 볼 때에 하나님은 불가피적으로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 내 모든 감각 기관, 나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늘이 아니냐 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에요? 일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알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춥다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 가지고 아는 것이 아니냐. 이와 마찬가지로 신이 계시다면 신이 계신 것을 여러분이 느껴야 되겠습니다. 세포로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 경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적인 입장을 어떻게 우리가 확정짓느냐 하는 문제,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 종교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라는 것은 체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인식이라는 것은 어떠한 관념적인, 지식적 논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체험을 갖지 못하는 신앙은 장구한 신앙이 될 수 없고 체험을 갖지 못한 신앙의 자리는 자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환경이 어그러지게 될 때는 그 자신도 치우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로울 때에 그 외로움이 나만의 외로움이냐? 외로왔던 하늘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더불어 외로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면 내가 외롭기 전에 먼저 하늘이 외로워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기쁠 때도 나만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더불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기 전에 먼저 하늘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059-293 그렇기 때문에 혼자 있어도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기뻤던 그때를 재연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외롭고 슬펐던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권고했었다면 그런 자리에서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각오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을 친히 느끼고 그런 환경에서 자기 신앙생활을 우지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환경과 생활하고 있는 무대가 아무리 비참하고 처참하더라도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독하고 처참한 환경이 그 사람에게 고독하고 처참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독은 미래에 가중된 희망을 촉구시키고 그 처참함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에 새로운 소망을 촉구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신앙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비로소 나만이 아니라는 그런 경지에서 자기 스스로가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나님이 계시다, 그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나와는 하나다" 하는 자각된 입장에 서서 자기의 모든 소신을 한 목전에 결정적으로 집중시캬 가지고 나서게 될 때에 거기에는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체휼적인 자리에 있어서 자기의 새로운 자각을 어떻게 확정짓느냐? 폭풍우가 불어오는 그런 환경의 첨단의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밀려날 수 없다는 자각, 어떠한 어려운 사선이 내 앞을 가로막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자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나님은 모든 악을 심판하는 공의의 주인공이시며 선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보호의 권한, 악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심판의 권한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나는 선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악을 제거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편이 아니냐" 이렇게 자각하는 입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길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신 세워 소수의 무리를 이끌어 가나안 복지를 찾으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은 첫째로 무슨 명령을 했느냐 하면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은 그저 막연한 자리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이 같이 하니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어려움을 대비해 가지고 배후에서 배수진을 치고 여러분을 찾아오고 있고 여러분과 동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고통이 가중될수록 그 고통은 여러분을 망하게 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여러분의 가치를 타진하기 위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부딪치게 하는 것은 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이너스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한 사탄세계 앞에, 악한 역사 시대의 인류 앞에, 실패의 원칙을 따라오던 인류 앞에, 또 실패의 원칙을 제시하는 사탄 앞에 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수난길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거기에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환경을 타개하고 나서게 될 때 그 환경에 처해 있던 인류는 새로운 소망의 인물로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059-295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완전한 대상이 생겨나는 것이 천지 이치라는 것을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서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나오게 되면 주체 형성은 자연히 벌어지는 것입니다.  

 

* 여러분들이 길을 가다가 엇갈려 가는 사람을 척 보더라도 공연히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다구요. 어떤 사람을 보게 되면 달라는 것이 없는데도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달라는 것도 없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쁘다구요. 이것은 그 선조로부터 자기와는 상충적인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손이면 반드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지남철과 같습니다. 지남철 가루같이 생겨나는 거예요. 알겠어요? 하나님이 절대적인 지남철의 주체라면 인간은 작은 지남철 가루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지고 인간은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는 끌려간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나서게 될 때나 혹은 시작에 갈 때 "오늘 시장 가는데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냐?" 할 때는 자기라는 관념을 벗어나 가지고 그와 같은 관념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조그마한 지남철인데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강한 지남석의 작용을 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내가 그 근처로 가게 되면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러면서 그리고 찾아가는 거라구요. 그런 생활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그냥 그대로 일어나서 어제 살던 그 사람,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 내가 어젯밤에 잤기 때문에 자고 일어나는 나는 어제 그 사람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 어린아이에게 있어서는 어머니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딴 욕망의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어머니면 어머니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생명이, 감각기관이라든가 의식 기관이 전부 다 어머니에게 동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 나서도 어머니, 젖을 먹기 위해서도 어머니, 어머니 외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혼자 잘 때도 어머니 품에 품겨서 아버지 품에 안겨서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거라구요.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자고 일어나서 자기가 자기 손을 쓱 보아도 손이 빛나는 것을 느낀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아니다" 하고 느끼는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깊은 품에 품겨서 무한한 사랑권내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권이 있다는 거라구요.

 

058-297 "하나님이 전부 다 해 줘야 내가 믿지,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전부 해 주는 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찾아가야 할 복귀의 행로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주체로 모시고 살고 있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사랑하는 분의 모든 것은 귀하게 느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모슨 것이 수습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손수건 하나 가지고 일생을 고독한 자리에서 생활하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주도적인 힘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가 부르는 그 아버지는 얼마나 수고했느냐는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를 찾아 헤매면서 수고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결국은 나 하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 세계를 동원하고 역사를 동원하고 우주를 동원해 가지고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 하나 찾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 여러분이 자다가도 아버지 할 수 있고 혼잣말로도 아버지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 상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움이 복받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그 생활 이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가 없는데도 아버지 손이 잡혀진다구요. 그런 일이 있다구요. 꿈같은 사실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면 아버지 품에 안긴다구요.

 

* 내가 나를 중심 삼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빚을 지는 놀음을 했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빚을 탕감하는 놀음을 했느냐? 빚을 지는 일을 했다면 그 일을 끝내고 돌아설 적에는 눈물이 사무칠 수 있는 자기를 발견할 줄 알아야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일을 끝내고 돌아설 때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 없거들랑 얼굴을 들 수 없고 그 자체를 떠날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서도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 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 신앙생활이라고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058-305 여러분이 항상 신애 대한 체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체휼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대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058-307 며칠 하다가 그만두지 말라구요. "내가 시작했으니 죽을 때까지, 내 일대에 안 되거들랑 몇 대에 가서라도 할 것이다." 해야 하는 거예요. 되는 거라구요.

 

몇 대를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건 하나님이 세계적인 축복을 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끈기 있는 족속이니까 네 후손한테 가서 한 10대고 20대고 기다렸다가 이 세계적인, 역사적인 축복을 너희 족속에게 해 줘야겠다." 하늘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053-309 주체나 대상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주체를 위하든가 대상을 위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으면 모르지만 있으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절대적으로 위했는데 망할 수 있는 자리에 간다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들어서라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들어서라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자들에게 있어서는 뭐 걱정을 하고 눈이 사팔뜨기가 되어 가지고 이용하려고 날뛰고···. 그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변명하기에 입이 나불거리는 그런 사람들은 오래가지  않는다구요.

 

언제나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하늘은 주체다" 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내 눈의 주체는 하늘이다. 그러니 내가 보게 될 때 혼자 보지 말고 주체를 위해 봐야지." 그래야 된다구요.

 

058-311 자,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체휼이 필요하지요? 하고 싶지요? 그래서 자기 혼자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를 대하게 될 때···.

 

선생님이 어릴 때 수양하는 하나의 표제가 그거였습니다. 모든 일은 문의와 더불어 결정해라, 하늘과 더불어 문의해 가지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만사를 문의하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체휼 신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건이 뭐냐? 주체와 대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다" 하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하나님은 내 일을 망각할 수 없다, 방관할 수 없다, 여기에 같이 계신다 하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에 앞서 가지고 감사할 수 있는 생활 형태가 벌어지게 될 때 거기는 하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맨 처음엔 느껴지지 않지만 어느 단계에 들어서면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058-320 천 가지를 주고도 부족한 것을 느끼고 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주고 자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아야 돼요.

 

그 마음 앞에는 무엇이든지 안 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다 주고 나서도 자랑 못 하고 더 주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부모를 주체로 모시게 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생활면에서 아버님을, 하늘을 눈물짓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일대에 있어서 하늘이 나와 더불어 통곡한 사실이 있다 할 때 그런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효자를 앞에 놓고 효자 때문에 눈물 흘리는 부모는 불행한 부모가 아니에요. 행복한 부모입니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소망의 눈물이요 희열의 눈물이요 감사의 눈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058-322 국가적으로 신애 대한 체휼을 하고 새로운 자각을 해서 세계를 새로이 각성시킬 수 있는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 통일교회가 수난길을 극복해 나온 노정이 아니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