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10.11(일) 전본부교회.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 아담 해와가 타락한 그 순간의 하나님의 심정.
007-290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찾아 나오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느냐? 여러분의 관념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다 할진대 부모는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개의치 않으며 죽음도 어떤 행동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일망정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밖에 안 될 것인가? 어떠한 역경과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고 희생을 개의치 않고 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본연의 인간을 사랑하시려던 그 사랑은 타락한 세상에서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죽던가,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던가 할 때에 슬퍼하며 고통을 느낍니다. 또 의식까지 잃어버리거나 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고 미치고 죽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어떠할 것인가?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007-291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아담 해와를 지으셨고 또한 사랑의 동기 되시며 사랑의 원천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을 몽땅 쏟기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자라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무한히 즐거워하시고 무한히 행복해하며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럴 게 아니겠어요? 그런 아담 해와였어요.
창조주의 위신까지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신까지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실존성까지도 잊어버리고 그런 심정으로 아담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이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007-292 여러분들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는 것을 그저 막연히 듣고 있습니다. 내용이 희미하고 들은 것이 희미합니다. 거기에 대한 아무런 심정의 반응도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그 순간 하나님의 심정은 터질 듯, 찢어질 듯, 미칠 듯하였습니다. 자신의 처신을 잊어버릴 만큼 혼돈된 아버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는 뼛골이 녹아짐을 느끼며 자기가 대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거늘 타락의 길을 밟아 사망선으로 넘어가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느냐. 그 마음을 알지 않으면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체득한 자가 있다 할진대 그 사람에게는 인간 세상의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고 난 후에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 고통은 무엇이뇨?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이상의 고통이 없다.
007-293 그러면 이러한 슬픔을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에요. 명예가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슬프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무엇이뇨? 내가 어떠한 입장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고통이 아니에요.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는 것 이상의 고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 배척하는 인간이라도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들딸이라는 심정.
007-294 타락한 이후, 인간이 천만 번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를 위한 일이라면 수고도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아니 하셨습니다. 개인 앞에 배반당하고 민족 앞에 배반당하고 유대 국가 앞에 배반당하시면서도 반역한 그들을 저버리지 못한 원인을 어디에 있는가?
자식이 죄를 짓고 허랑방탕한다고 부모가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로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인연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을 저버릴지라도 이 인연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을 저버리지 못하시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들은 만천하에 불효의 팻말을 붙여 천대를 받아 마땅한 후손입니다. 우리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렇습니다.
국가적으로 보게 된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君王이십니다. 하늘을 군왕과 같이 모시고 하늘 앞에 충신 중의 충신이 되어야 할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니 역적의 종족이라는 팻말을 붙여 만천하에 공개해도 抗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종족입니다.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 이런 사정이 있다면 원수 중의 원수일 것인데, 그 원수 중의 원수와 같은 입장을 넘어설 수 있는 심정을 갖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느뇨?
사람을 대하여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들딸이라는 심정이 하나님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해 있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배척당하고 내일도 배척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배척당하고 저곳에서 배척당하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참다운 자식을 찾아 나온 걸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울어 본 적도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인간들아! 네 자식이 그리워 울기 전에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울어라. 그 무엇이 원통하다고 땅을 치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치며 가슴을 쳐라, 땅의 그 무엇이 미치는 자가 있거든 이 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하여 미치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기도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십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추상적이 아니에요. 슬픈 그 가슴을 누구한테 하소연할 것이며 고통과 억울함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이뇨? 그럴 수 있는 이가 세상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붙들고 울고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울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 이것이 우리들이 所望해야 할 最高의 基準이라 하겠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가? 어떤 주관자도 아니요, 여러분이 그 인연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6천 년 동안 미치는 것 이상의 심정을 지니고 땅을 대하여 허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아버지를 향해 저주에 저주, 배반에 배반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제라도 하늘을 향하여 미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을 그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007-296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쓰러지게 될 때에 그 부모가 미치는 일이 있거든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뇨? 부모의 사랑에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가한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 더욱이나 거기에 사탄이 조롱합니다. 자식을 품고 품고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이여! 자식을 두고 한숨은 웬 말이요, 탄식은 웬 말이요" 라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어떤 궁전 가운데 편안히 앉아 계신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역사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6천 년이란 역사를 허덕이며 찾아오셨습니다.
007-297 나를 찾아오신 이 하나님이 모습을 위로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고 인간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퍼하시며 찾아 오셨던 하나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갖고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위로하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겠어요, 안 바라시겠어요?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얼마나 쓰러지셨으며 얼마나 허덕이셨나이까" 할 수 있는 아들, 천만 번 수고하고 천만 번 모욕을 당하고 천만 번 어려움을 당하시면서도 슬펐던 가슴을 헤쳐 놓고, 억울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분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통정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요, 우리가 모셔야 할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뒤넘이치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은 이 땅 어디에 있는고! 그 아들딸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중심 삼고 화할 수 있는 하나의 무리,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이 찾아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요, 그러한 세계가 창조 이상세계라는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不幸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땅 위에 不幸이라는 명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 외에는 그런 명사를 붙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불행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 불행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선의 동산을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사랑하고 천지만물이 화답하는 가운데서 즐거워하기 위하여 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어디 그랬다는 곳이 있어요?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심정, 그것은 외아들을 잃어버린 서러운 심정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어버린 서러움이었다는 거예요.
007-298 예수님을 독생자라 하였습니다. 독생자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홀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보내신 분이 예수였습니다.
* 예수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무엇을 했어야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은 생활이 어떻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고 사는 사회가 어떻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고 사는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아셨다.
007-305 친구가 되고 누구보다 가까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 가지고 그것을 붙들고 위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의 친구가 되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하고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다면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나도 그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4천 년 동안의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 못하고 가셨습니다. "내가 세상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슬펐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기쁨을 아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 그러면 하나님의 슬픔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고통이 무엇이뇨? 아들딸을 잃어버린 것이 슬픔이요,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것이 苦痛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릴 만한 사랑의 심정으로 아들딸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서부터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3장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1959.3..8(일) 전본부교회. 발걸음을 멈추고 지키시는 자를 다시 바라보자.
005-356 하늘이 6천 년 동안 수고하고 슬퍼하신 것은 종교의 어떠한 경전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 인간이 하늘을 찾아나가는 것도 그렇지만 기쁨은 한날에 대번에 찾아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길을 지나고 난 후에는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는 자가 땅 위에 있다 할진대, 하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는 "내 일생에 하나님의 6천 년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손을 들어 기도하고 통곡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선하고 아릅답고 귀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입장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슬픈 입장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발견한 그 사람이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선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 하늘이 눈이 있어 눈물을 흘렸다 할진대는, 이 땅의 어떠한 호수나 대하의 물보다도 더 많이 흘렸을 것이요, 하늘 땅에 채울 수 없을 만큼 눈물 흘리며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은 산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산을 하늘의 수고와 고통의 산정으로 느끼고, 바다를 보면 그 바다를 하나님의 눈물로 느끼고, 초목을 바라보면 그것을 하나님의 걱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크고 높고 깊고 넓은 온 천체를 바라볼 때 그 모든 현상이 아름답지만는 그 아름다움이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 것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에게는 슬픔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느낄 줄 아는, 그러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참다운 효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즐거워 하는 데에서만 효자 효녀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효자 효녀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기쁨보다도 아버지의 슬픔, 아버지의 어려움을 대신할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만 효자 효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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