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정주보통학교 - 1935.4.1. 4학년 편입. 문제는 우리가 적을 알아야 된다는 거였어요.

true2020 2019. 3. 27. 17:22

* 1934.4.1 五山普通學校 3학년 편입.

* 1935.4.1 定州普通學校 4학년 편입.

* 1938.3.25 정주보통학교 졸업. 

  

▣ 1990.12.30(일) 본부교회. 70년대를 보내고. 80년대를 맞는 경계선에서.

211-132 선생님은 소년 시대를 대한민국의 자주적 국가권 내에서 자라지 못하고 일본의 압제권 내에서, 일본의 통치하에서 자랐습니다. 25세까지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점차 세상을 알게 되고 젊은이로서 지낼 수 있는, 어려운 사정을 측정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시기에 나라 없는 백성으로 자란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섭리적으로 볼 때에 그런 어려운 국가적 사정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나라의 통치권 내에서 민족이 당하는 비참상을 어려서부터 마음 깊이 느끼고, 이러한 환경적 여건을 어떻게 打開해 나갈 길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철이 나게 되고, 십 대를 넘으면서 글방에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안에서 외지에 나가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다 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섭리적으로, 뜻적으로 볼 때에 둘째 번으로 태어난 아들이라든가 그런 사람들은 전부 다 문제가 생겼어요.

 

그렇기 때문에 문중에서 "공부시키면 죽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학교 같은 데는 못 가게 하고, 글방(1925년. 6살~12살)을 중심 삼고 공부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자라던 선생님의 일생은 전부 다 개척, 개혁이었습니다. 글방에 다니면서 비로소 뜻에 대한 이 길을 알고 난 후, 15, 6세부터 마음을 정해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글방에만 있어 가지고는 안 되겠다" 이거예요. 비행기가 날고, 기차가 달리는 이런 과학문명의 시대가 점점 확장되어서 앞날을 이끌어가게 될 것을 완연히 느끼는 그런 자리에서 "이런 글방에만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거기서부터 혁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학원에 들어가서 공부해 가지고, 그때로 말하면 보통학교에 들어간 거예요. 五山小學校.(1934.4.1) 여기도 오산학교가 있지요? 그때는 오산보통학교지요. 

 

그 학교에 3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일 년 공부하는데 열심히 안 할 수 없지요. 결사적으로 했더니 성적이 좋아서 5학년으로 越班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오산소학교, 지금으로 보면 국민학교지요, 에서는 일본 말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일본 말을 못 쓰게 해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원수의 자리에서 투쟁한 대표적인 사람인 이승훈 李昇薰(양 1864.3.25~1930.5.9. 평북 정주군 출생)씨가 세운 학교이고, 그런 학교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일본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 五山學校

- 1907년 7월 1일 南岡 이승훈 선생 고향 용동에 소학교 강명의숙講明義塾 설립.

- 1907년 12월 24일 오산학교 창립. 4년제.

- 1925년 8월 29일 재단법인 오산학교 인가. 초대 재단 이사장 남강 이승훈 취임.

- 1926년 11월 2일 오산보통학교와 오산고등보통학교(5년제) 설립.

- 1939년 5월 15일 오산중학교로 개명.

- 1953년 4월 25일 피난지 부산시 동대신동 산 4번지에 재건.

- 1954년 4월 16일 환도에 따라 용산구 원효로 2가 92번지 이전. 

- 1956년 4월 1일 용산구 보광로 7길 17 이전.

 

※ 남강 이승훈

- 양 1864.3.25~1930.5.9. 평북 정주군 출생

-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놋그릇 가게의 노동자가 되었다. 10여 년 동안 놋그릇 행상과 공장 경영으로 국내 굴지의 대 실업가로 성장하였다.

- 1905년 평양에서 만민공동회의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평생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봉사.

- 1910 장로교 신자.

- 1916 장로교 장로로 선출.

- 1919.3.1 불교(2명), 천도교(15명), 기독교(16명)의 민족 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 기미독립선언서(최남선이 초안 작성. 1919.3.1 오후 2시 태화관에서 회동. 신흥사 승려 한용운이 낭동)에 서명.

-1930년 경성제국대학에 시신 교육용으로 기증 약속했으니,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한 채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문제는 우리가 적을 알아야 된다는 거였어요. 적에 대해 세밀히 몰라 가지고는 적과 싸우더라도 대비책을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정주보통학교, 공립보통학교예요, 거기에 편입시험을 쳐 가지고 4학년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거기 들어가서는 일본 말을 유창하게 하게 돼 가지고 졸업을 한 거예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앙길이라든가, 인생의 근본문제라든가 어려운 모든 문제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