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연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
2. 고대하는 심정이 있어야 된다.
3. 참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 1959.3.29(일) 전본부교회. 신앙자의 태도
006-070 오늘날 여러분 한 자체가 생겨난 것도 자신이 생겨나고 싶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 여러분도 알 수 없는 어떤 움직임에 휩쓸려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나 스스로 자랑할 나가 아니라 나에게는 역사를 들어, 전체를 들어 혹은 미래를 들어 이념적인 권내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이런 信念과 느낌을 가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의 신앙길에는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게 되고 슬픈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어려운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억울한 죽음까지 부딪치게 되며 천륜의 인연을 저버리는 신앙자의 태도를 취하기 쉽게 되고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념에 대한 사무친 심정을 지녀야 되겠고 내 생활을 이 이념에 의해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신앙 세계의 이념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은 우주적인 인연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 祭物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런 느낌이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이 땅 위에 감히 여러분을 침범하거나 굴복시킬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 아담 이후 1600년 동안 하늘을 저버렸던 인류 앞에 다시금 새로운 약속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택하여 천추의 한을 푸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노아였기에 노아는 하늘의 뜻, 하늘의 명령을 붙들고 120년 동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는 하늘이 세워 주고 불러 주고 명령하였던 그 인연이 귀중함을 알게 될 때 그 앎이 크면 클수록 하늘과의 인연이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자신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뜻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을 더 깊이 느꼈던 고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이 비웃고 배척했지만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 생활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006-072 노아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은 모세에게 있어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스러운 환경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하여 선조들의 뼛골을 통하여 자기의 피살에 뻗쳐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에 그것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006-073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 년 만에 타락한 아담의 모든 실수를 그 몸에 담당하고 하늘의 슬픔과 만민의 슬픔과 온 만상의 슬픔을 그 몸에 지니고 하늘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모든 흑암의 조건들을 홀로 담당하고 이것을 타파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제2의 인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회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땅 위에 어떤 분으로 오셨던고. 그는 4천 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죄로 말미암은 슬픔을 감촉하지 아니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선의 감촉과 선의 심정에 사무쳐서 지으셨던 본연의 아담 해와를 그 마음으로 동경하였습니다.
* 그는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드려야 하고 선조들이 타락으로 저끄린 모든 죄상을 탕감해야 할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진 자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타락한 아담을 원망하기에 앞서, 타락한 후손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아가서는 천사장을 원망하기에 앞서 그 원망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세 이후 4천 년의 서러운 복귀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아버지요 아들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자기 자체인 것은 느끼게 되었습니다.
006-075 이러한 관점에서 바른 신앙자의 태도는 자기라는 것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야 하늘과 기쁨의 인연을 맺고 사라지는 그 기간에 "아버지여,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맺어 왔던 슬픔과 원한의 인연을 종결짓고 기쁨으로 얽힌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소유할 것이 영원한 나라요, 이러한 자들이 살 곳이 하늘나라요, 이러한 자를 찾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여러분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올 때에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인연이 맺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발길을 돌리려 해도 무엇인지 미련을 가지게 하는 인연이 여러분들을 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 나로 말미암은 인연이 아니라면 누구로 말미암은 인연이었던고. 피눈물의 역사를 해원하기 위해 세운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이 우리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감촉이 심중에 느껴질 때마다 자기 存在 意識조차 잊어버리고 쓰러지면서라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최후에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고개를 넘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될 때에 비로소 주을 맞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006-077 세상의 친구도 사귀었다가 헤어지게 될 때에는 서운해하고 슬퍼하거늘 하물며 하늘을 중심 삼고 나가던 인연의 노정이 끊어지는 그 순간은 어떠하겠습니까. 역사적인 슬픔의 순간이요 천지의 슬픔의 순간이요 인류와 천상의 슬픔의 순간이라는 것은 여러분은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를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가도 가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래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래야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배웠듯이 오늘날 우리 개체가 선 위치는 하늘땅과 저나라에 있는 영인들의 한까지 해원성사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사적인 제단에 놓여 있는 여러분입니다.
006-080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이 인연, 이 상대적인 인연에는 역사적인 시선이 주시하고 있고 역사적인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인연의 심정을 느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순간, 그 자아의 의식이 돌아오게 될 때 나는 오늘의 나로되 이 땅 위에 한정된 나가 아니요 영원한 세계의 이념권내에서 보장하는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늘은 완성한 자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제가 일진대는 참된 신앙자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연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의 은사도 오늘의 기쁨의 인연이 미쳐진 은사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을 인계받은 은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006-084 그다음 신앙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고대하는 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연을 갖고 있는 연고로 고대하지 않으래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고대하뇨? 신앙자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006-087 그다음에는 참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도 참아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그날부터 이날까지의 역사 노정은 참음의 노정이었음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 참지 못하여 타락한 인간이 되었던 연고로 참는 자가 승리의 한날을 세울 때까지는 하나님도 참지 않으래야 참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뜻을 어겼으니 참는 한 자체를 찾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해원될 수 없습니다. 즉 참아서 하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리고 참아서 민족을 해원하고 우주를 해원하여 행복의 한날을 소망하고 싸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에서도 남아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만나시기 전까지는 참아 나오신 역사를 종결 지을 수 없고 심판의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 기독교에서는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데 그 심판은 무엇이뇨? 하늘이 참아 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한 때를 고대하며 참아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풀 수 있습니다. 심판의 권한을 갖고 심판대에 나서서 원수를 심판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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