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김인철 "섭외, 그 외길을 돌아보며"

true2020 2017. 10. 17. 16:51

▣ 김인철 金寅哲 1912.11.16(음10.8) 간증3- 26.


* 황해도 재령군  서호면 신정리에서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던 부친 김근필 모친 박글선 사이에서  출생.

* 4살 천자문 공부

* 유치원을 마친 후, 기독교 계통의 사립 명신보통학교 4년간 수학.

* 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

* 11살 때, 해주로 이사해 海州市內 국민학교에 전학.

* 아버지의 뜻으로 서울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경신중학교에 입학.

* 1929. 11.3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있었다.

경신중학교 1학년 때 데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 동대문 경찰서에 1달 구금. 

* 재령 명신중학교 2년에 편입.  

* 1936 숭실전문학교 농과 졸

* 일본 나고야 중학교.


* 1945년 해방 때는 운수창고업. 결혼, 7남매를 둔 가장이었다.

* 1950.6.25 한국동란.때는 경찰국장 담당.  

* 1951.1.4 후퇴 때 부모와 처자식은 북에 놓고 홀로 해주항에서 남하. 연평을 거쳐 군산 난민 수용소에 정착.


* 이후 공산당은 50만 원 현상금을 걸고 김인철 경찰국장 체포령. 당시 100원이 한달 월급.


* 나는 가늘 길 없는 외로움과 슬픔에 잠길 때가 많았다. 술과 담배, 방탕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달랬으나 그것이 치유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못 되었다. 술과 담배는 도피의 방법은 될지 모르지만 근본 해결책은 아니었다.


이따금 어릴 때 내게 당부하던  "교회에 나가라,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부친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 1955년 서울에 還都했을 때, 서울은 텅 비어 있었다. 빈집이라면 아무곳에서도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이때 미국무성 직속의 반공통일연맹의 황해도 상임위원으로 1년 정도 있었다. 이 단체는 앞으로 통일이 되어 이북에 들어갈 때를 전제한 조직이었다.  


* 1955.2.21 통일교회 입교 입회원서 번호 100번.


* 경의醫大의 전신이 동양醫大의 노정우 교수의 인도에 의해서였다. 그이는 나의 중학교 후배로서 어느날 나를 만나자 다짜고짜로 "가 볼 곳이 있으니, 같이 갑시다" 고 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따라간 곳이 흥인동에 있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였다. 방문한 그날부터 유효원협회장의 강의를 1주일간 들었다.


* 당시 교회의 식구들은 많지 않았다. 강의할 때 황환채, 유광렬, 박봉애, 최정순씨가 보일 정도였다. 나와 동서지간이었던 이봉은 장로, 숭실전문 동창생인 작곡가 김덕진씨 또 박정화씨가 있었다.


* 그때 교회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찬송하고 기도하면 앉아 있던 사람이 진동하여 방바닥에서 뜨기도 하는 등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 그 뒤 교회는 흥인동에서 장충동을 거쳐 청파동으로 옮기었다.


* 선생님께서는 함께 일하기를 원하셨지만 해주에서 알고 지낸 조용순 법무부 장관과 한국은행 총재 김유택씨의 추천으로 米倉에 취직. 


* 이대 연대 사건이 나기 직전 무슨 일때문인지 기억은 없지만, 선생님은 나에게 성동경찰서에 갔다 오라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섭외의 첫출발이다.   


* 1955.4.1 마산 지점으로 발령


* 여수 지점 차장으로 발령 9개월 근무


* 이화여대 법정 대학장이며 검찰총장을 지낸 나의 竹馬故友 이태희 씨가 어느날 서울에 출장왔던 나를 만나 하는 말이 "자네는 이제 기관장도 되었는데 혼자서 지내서는 안 되겠네. 가정을 새로 꾸미게" 하는 것이었다.


이북에 7남매의 혈육을 두고 왔는데 이제 다시 가정을 갖는다면 죄받을 노릇이 아닌가 하고 거절했다. 그 뒤 몇 번이고 상경할 때마다 재혼 권유를 받고 허락을 하고 말았다.


* 나처럼 재혼하는 사람으로 예수를 믿고 나이는 나와는 7, 8살 차이가 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소개받은 이가 이화여대 음악과 출신으로 남편과는 사별한 후 어린 애 하나를 기르며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고는 재혼 사실이 큰 자랑거리라도 되듯이 선생님께 찾아가서 보고를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아, 이 사람아, 나도 모르게 결혼한단 말야?" 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 포항지점으로 전근. 4개월 근무.


* 1956.7 대전 지점장으로 부임.

* 대전에서는 강현실 전도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당시 나는 집사람과 함께 교회에 나가곤 했다. 마산 여수 포항 등지에서 근무하며 교회와 인연이 멀어지면서 술 담배를 다시 하고 있었다.


* 우리 집에서 일하는 강문자라는 처녀와 당시 대전교회에 나오던 유선일 군을 통한 영적 역사가 있었다.  


* 어느 날 아침이었다. 출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데 주머니 속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그때 집에서 일하고 있던 강문자에게 "문자야, 돈지갑 못 봤니?" 하고 물었다. 못 봤다는 것이었다.


출근시간이 늦어서 그대로 회사에 갔다. 잠시 후 문자가 회사에 찾아와서 "아버지, 돈지갑 정말 없어졌어요?" 하고 물었다. 회사 옆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나는 친딸처럼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정말 없어졌다" 했더니 "그래요?" 하며 문자가 돌아서서 집으로 가는데 이상해서 집까지 따라가 보았다.


문자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 누군가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웃방(윗방, 이어져 있는 두 방 가운데 위쪽방)이에요?" "웃방에 있는 벽장 안이에요?" 라고 했다.


엿듣던 내가 혹시나 하고 얼른 웃방으로 뛰어가서 벽장 안을 찾아보니 정말 돈지갑이 거기에 떨어져 있었다. 


* 당시 또 나에게는 몸이 무척 아픈 일이 있는 뒤에 화장실에만 가면 피가 쏟아져 내리는 일이 일어났다.


유명한 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약방을 찾아서 약을 먹었다. 그러나 그칠 줄 몰랐다.


하루 아침에는 문자가 입신을 하여 선생님 역사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절을 하고 무릎을 꿇었다. 


왜 하혈을 합니까?  죽지는 않겠습니까?  "괜찮아, 16일만 참아"

왜 그렇습니까? "나쁜 피를 뽑아내고 새 피를 넣는 거야"


그 일이 있은 뒤 정확히 16일 만에 약을 쓰지도 않았는데도 止血이 됐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또 어느 날 문자가 선생님 역사를 하는데 불현듯 "인철씨 집에 불이 날테니 조심하라구" 하는 것이었다.


* 하루를 보내고 새벽녘이었을까 목이 말라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자욱한 연기와 함께 "쾅" 하는 소리가 나더니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준비했던 물로 불길을 잡았다.


* 하루는 출근을 하려는데 한 청년이 찾아와서는 "지점장이십니까?" 하면서 꾸벅 절을 했다. 그렇다고 하니 대뜸 봉투 한장을 꺼내어 내미는 것이었다. 


"저는 의정부에 살고 있는 정상운입니다. 성균관 대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세관에 근무했습니다. 한달 전에 전도 나온 통일교인에게 방을 내주고 원리말씀도 듣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꿈속에 제가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素服(하얗게 차려입은 옷. 흔히 상복으로 입는다.)한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너, 장사 잘 되느냐?" 하고 묻기에 "잘 안 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대전 米倉으로 가라" 하고는 할아버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꿈이 너무 신기하여 다음날 아침 우선 "대전이란 곳까지 가 보자"는 결심으로 의정부을 떠나 대전에 도착했습니다.


꿈 하나 꾸고서 이렇게 막연하게 찾아 나선 것이 황당하긴 했지만 이왕 왔으니 미창이라는 회사를 알아 보자는 마음으로 대전역에서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고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꿈을 꾸고 찾아왔다고 말로 해서는 납득이 안 될 것 같지 않아서 일단 모든 사연을 편지로 썼습니다'    


사연을 읽고 나니 무언가 머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 1957년 5월 23일 우리집에 살고 있는 강문자를 통해서 속리산으로 금케러 가라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2년 반 동안 크고 작은 영적 영적 역사가 일어난 후, 이것이 아홉 번째 역사였다.


"내가 인도해 줄 테니 금 케러 가라. 장소는 속리산이야. 갈 인원은 10명이어야 한다. 6천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 정성 들이고 가야 한다. 반드시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여비를 받아서 가라. 안내는 강문자가 해야 한다" 이것이 계시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대전교회에 나오는 유선열이라는 고등학생에게도 같은 시간에 계시가 내렸다. 유선열이 받은 계시는 강문자와 받은 계시와 약간 차이가 있었다.


반드시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여비를 받아서 가라는 것과 안내는 강문자가 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 당시 대전교회를 맡고 있던 김종신 목사는 나에게 "금 케면 속리산에 기념관을 짓고 대전교회를 멋지게 지어 봅시다" 라며 당장 금이라도 나온 것처럼 흥분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교회에 10명의 식구가 모였다. 


* 준비물은 곡괭이 하나였고 경비는 마침 전날 내가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속리산으로 떠나기 앞서서 나는 문제를 제기했다. 강문자에게 내린 계시는 반드시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여비를 받아서 가라고 했는데, 그냥 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김종신 목사는 교회에서 유선열에게 내린 계시는 그런 말이 없으니 그냥 가지고 했다.


나는 교회의 중심은 목사님이지 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일단은 목사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대전에서 충북 보은으로 가는 직행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또 유선열에게 계시가 내렸다. "인철씨, 가서 알사탕 한 봉지 사와".


눈을 지긋이 감고 무게 있는 목소리로 지시해서 그대로 시행했다. "의심하지 말고 먹어" 하면서 알사탕 2개씩을 한 사람에게 이름을 부르면서 주었다.


차가 30리를 달리도록 역사는 계속됐다. 일행 중에 속리산에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행길에 어디로 가야 될지 막연하였으니 때마다 계시가 내릴 것을 믿고 따라갔다.


버스가 옥천을 지나 보은에 들어서자 골짜기로부터 훈훈하고 향기로움을 가득실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보은에 도착했다. …속리산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하오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망서리고 있는데 김종신 목사가 "이제 속리산에 왔으니 앞냇가에 가서 식사를 하고 기도를 합시다."     

 

* 1959,12.30 내무부로부터 공기총 제조 허가. 인천 주안 예화 총포 제작소 사장, 유효민 형제.

* 1960.10 협회 초대 섭외부장. 

* 1968 (주)통일산업 초대 사상.

* 1968 국제승공연합 초대 이사장

* 1981 국제승공연합 회장

* 1983.(주) 일화 상임고문


* 나는 입교 이후 소위 통일교회 정통의 길이라는 목회자의 생활은 해 보지 못했다. 오로지 섭외 그 외길만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협회 초대 섭외부장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나의 공적 노정 절반을 사람을 만나고 문제를 해결하는 섭외 쪽에서만 일해 온 셈이다. 


* 언젠가 군산에서 올라왔다는 영통인 한 분이 내게 해당하는 성경구절이라면서 나에게 준 것 중의 하나이다.  


▶ 이사야 41:10~13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 1981.11.22(일) 회고와 새 출발. 본부교회.

인철이가 훌륭한 것이 그거라구요. 뜻을 위해서 "네 집을 내라"고 하기 전에 그는 집을 내더라 이거예요. 그것을 내가 잊지 않는 거예요.


자기의 모든 월급 봉투를 털어 내 가지고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수고했다구요. 나는 잊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렇지만, 여기 앉아 있는 36가정에게 "너희 집을 누구한테 바꿔 줘" 하고 지시해 봤다구요. 그런데 못 하더라 이거예요. 그 이름을 내가 알아 놓은 거예요.


부모님을 拒逆하는 것보다도 형제를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자기 안방을 내줘야 할 것이 뜻의 사연이지요.   


▣ 1984.7.1(일) 참된 인생길. 미국.

이번에도 보희 박한테 말이에요, "미스터Mr 한에게 집을 내 줘, 이 자식아" 했다구요. 집을 내 줘라 해 놓고 쓱 보는 것입니다.


자기 집만큼 형제를 생각하지 못하는 녀석은 落第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 저 김영휘도 왔지만 말이에요, 옛날에 내가 "김인철을 위해서 집을 바꿔 줘라" 할 때 싫다고 한 通告를 내가 잊지 않고 있다구요. 그거 생각 나? 


* 자, 어떤 것이 남을 돕는 거예요. 형제를 집 한 채만큼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하고 집 같은 것은 뭐 버려 버리는 사람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편에 가까운 사람이고 세계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 선생님에 대해서 "이스트가든을 식구들한테 나눠 줘라" 고 하나님이 그러면 선생님은 식구들한테 준다구요.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미련이 없다구요. 이스트가든에 절대적으로 미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 1991.11.12(화) 도원빌딜. 초점과 화합. 재단 이사장 겸 구룹회장 이취임식.

여기 김인철이 나이 몇인가? 선생님 알아? 잘 모르지? 선생님을 아냐 말이야. 물어보잖아? (압니다.) 어떻게 알아? 얼굴은 알지. 선생님이 뭘하는지 알아? 청맹과니야. 지금 뭘하고 있는지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