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李貞玉 先生

true2020 2017. 5. 26. 11:30

▣ 李貞玉 先生 

- 증언 2집 "일심봉천"

- 주체는 마호메트


- 1922.8 전주에서 태어났다.

- 부모는 딸만 다섯, 나는 네째 딸로 태어났다.

- 네 살 된 오빠가 죽은 한 달 후에 내가 태어났다.

- 나의 애칭은 "이쁜동이". 

- 양친의 종교는 불교였다.  

- 전주여자보통학교.

- 전북 여고 입학. 


* 두 학급 110명 중에서 1~2등을 겨루며 반장직을 맡았고 선생님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 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잊을 수 없는 몽시를 몇 번 보았다. 내가 골고다의 언덕이라고 하는 곳 위에 섰는데 그 언덕 밑에서부터 "반석"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체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네모 반듯한 수백 층의 고층 건물처럼 보였다. 


* 또 다른 몽시는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기 이전 태초의 지구상처럼, 그 지구상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단지 山稜線산릉선만이 첩첩이 지평선 끝까지 보이는데 동쪽 하늘에는 붉은 태양이 솟아 오르고 하얀 구름이 그 태양 주위를 에워싸고 마치 춤추는 듯 물결 치는 듯이 움직였다.


나는 그 장엄하고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새까맣게 입은 20세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나타나 나를 잡으려고 해서 그만 도망쳐 어떤 마을로 들어가 숨으려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 세 번째 꿈은 소련군이 쳐들어 왔는데 내가 옛날 페르시아 군의 장군들이 입는 갑옷을 입고 그들과 싸우는 꿈이었다. 나는 둥근 철방패를 들고, 높은 계단을 자유롭게 날다시피 오르내리며 싸웠고 위험할 때는 잘 피해서 결국 승리했다. 


 ▶ 전북 여고를 졸업하고 동경여자약학대학에 유학.    


* 나는 독서를 무척 좋아했다. 세계문학전집은 거의 다 독파했었고 철학, 과학, 예술에 관한 것까지 무엇이든 읽었다. 


* 내가 대학을 갈 때 문과를 택하고 싶었으나 왜정 때에는 국문학과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藥學을 택하였다.


▶ 東京 유학 4년 동안 기숙사 생활.  


* 인간은 약하고 악에 물들기 쉽기 때문에 종교는 그런 인간을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의 수단이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구태여 종교를 갖지 않더라도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양심을 지키며 선을 지향해 가려고 노력하면 되지 않는가. 만일 내가 나이가 많아지고 육신과 마음이 약해져서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때는 기독교를 택하고 만년에는 꼭 이스라엘에 가서 聖地巡禮를 해 보겠다고 생각했다. 


* 藥大를 졸업할 때, 학장이 東京帝大 生物學 硏究室에 가지 않겠느냐고 나의 意思를 물었다.…東京帝大 硏究室은 우수한 성적이 아니면 갈 수 없었고 성적이 우수해도 하늘의 별따기만치나 힘든 명예로운 것이었다. 


* 때는 2차 대전 중이었고, 동경 폭격의 위험이 날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불안하여, 졸업을 중단하고서라도 귀국하라는 재촉이 있었다. …학장은 현해탄이 위험해서 배가 침몰할지도 모르니 가지 말고 남으라고 권고했지만 졸업을 하자마자 귀국했다. 


* 그후 선배 한분이 서울대학 연구실로 오라고 했으나 나는 교편생활에 더 매력을 느껴 1945년 1월 대전 충남여고의 화학 선생으로 부임했다. 


* 왜정 치하에 부임해서 8개월 만에 8.15해방을 맞이했다. 


* 1945.9 전북여고에 부임. 


* 모교에서 3년 동안 교편을 잡다가 1949년 3월에 전라북도 제일 갑부인 印氏 家門의 3남과 결혼했다. 


- 나는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하늘은 이것을 원치 않으셨는지, 1950년 6월25일 動亂으로 말미암아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動亂 중 첫 아들을 낳았으나,

생후 9개월 만에 잃었다.  

     

* 1956년 정초에 이런 결심을 했다. 즉 그해 12월 31일까지 살다가 다시 희망이 없다면 깨끗이 이 세상을 청산하겠다고…. 많지는 않았지만 내 재산을 처리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 당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해 4월 4일에 통일교회에 입교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 1956.4.4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입교.


* 입교 3년 전 하루는 갑자기 여자 무당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 댁에 앞으로 하늘의 큰 복을 조상들을 통해서 주시려고 하얀 광목(무명실로 唐木보다 좀 거칠게 짠 폭이 넓은 베, 倭布)을 하늘로부터 안방 창문살에 대고 있으니 이것을 받으시오" 라고 했다.


* 이 댁에 왜 이런 큰 복을 주시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무당 자신도 참 이상하다고 믿어지지 않지만 산신령님이 내몰아 쳐서 견디지 못해 왔다고 한다.  


* 전주시 동쪽에 기린봉이라고 하는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무당(별칭 꺼먹동이)은 그 산기슭에서 기린봉 산신령님을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가 받은 나에 대한 계시가 굉장히 엄청난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 밝힐 수 없지만 그 복이 그때부터 3년 후에 오게 된다고 했다.


* 사길자씨, 서명진씨, 박영숙씨는 전북여고 출신이었고 성적이 우수한 나의 수제자들이었다. 


* 1955년 겨울 방학 어느 날 내가 명진씨 집에 갔더니, 그의 언니 정진씨가 동생을 앞에 놓고, 부모와 의논 한마디도 없이, 이대에서 퇴학을 당했다고 꾸중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무슨 일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대 사건이었다. 그런데 명진씨의 꾸중듣는 태도에 나는 감동했다.  


* 그때 그의 나의 겨우 20여 세밖에 안 되는데 무엇이 어린 사람을 저토록 의젓한 인격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을까, 통일교회 진리가 무엇일까, 그 진리는 쉽사리 인격형성을 시켜 주는 것인가, 곰곰히 생각했다


* 이경준 박사의 모친 강순길씨와 같이 전북제사 사장 댁에 놀러 갔을 때 명진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봄이 되면 일부러라도 서울에 가서 통일교회 진리가 어떤 것인지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두 분이 똑같이 그러자고 쾌히 약속을 했다. 그 당시 전주에는 통일교회가 없었다.    


* 입교 후 한 달 만에 원리시험이 있다고 들었다. …3회까지만 합격자에게 친필로 쓰신 졸업장을 주신다고 하니, 그 친필 졸업장을 받고 싶었다.


- 1956.7.1 제3차 원리시험을 전주교회에서 몇몇 식구들과 같이 치루고, 그 답안은 곧 서울 본부교회로 보내졌다. 7월 3일 저녁 때, "시험합격, 상경 요망" 이라는 전보를 받고 7월 4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즉시 그날 밤차로 상경했다. 본부교회에 가보니 94점으로 합격이 되어 있었다. 


* 일 케럿이 넘은 다이어 반지 하나와 그보다 약간 작은 것 두 개를 팔아서 전주교회를 사는데 헌금했다.


이강철씨, 강순길씨 (이경준 박사의 모친), 변예자씨 (서명진씨의 모친), 변완복씨 (인제병원장 부인), 신신애씨 (박영숙씨의 모친) 등이 중심이 되어 헌금을 많이 하게 되어 大門이 둘이 있는 아주 크고 좋은 한옥 기와집을 샀다. 


* 1957년 8월에 家産을 정리해 가지고 상경했다. 남대문 시경 앞에 점포를 얻어 다시 약국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약국 명을 百和藥局으로 명명해 주셨다. 


* 청파동 전본부교회 앞에 바짝 붙어 있는 대지 60평의 한옥, 오두막 기와집을 사서 살림집으로 장만했다. 교회와 한 집 같아 교회 출입하기는 편리했다. 


* 어느날 여자 영통인이 지나가다가 들어와서, "이 집터가 명당이니 절대로 팔지 말라"고 하였다. 이 집터가 후에 바로 청파동 전본부교회의 대문이 되었고 선생님 차고가 되었으니 어찌 명당이 아닐 수 있겠는가.


* 이득삼 형님과 최원복 선생 두 분과 삼위기대를 묶어 주시었다. 


* 1957년 7월 식구들은 누구나 다 7일 금식을 하도록 선생님께서 명령하시었다. 이것이 7일 금식의 시초였다. 


* 1959년 12월, 제3회 40일 수련을 받게 되었다. 


* 1960년도 7월부터 전국 순회. 


* 1961년 1월 27일(음1960.12.11) 예진씨가 첫아기님으로 태어나셨다. …선생님께서 예진님을 맡아 돌보도록 말씀하셨다. 


- 9개월 동안 예진님을 키우고 1961년 9월에 또 전국순회 임무를 맡아 충청북도로 갔다. 



▣ 1999.4.16(금) 제40회 참부모의 날은 천지개벽의 시대를 연다. 중앙수련원.  

그래, 제일 성인하고 제일 악당들이 그 구덩이를 메웠으니까 히말라야의 산까지 평지가 되었어요. 그러니 그다음에는 선생님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아래는 떼거리로 다 축복해 주는 거예요.


* 성인들하고 통일교회 교인들하고 결혼시켜 줬지요? 이정옥! 없어? 이정옥! 상대가 누구라구? (마호메트입니다) 크게 해 봐! (마호메트입니다) 마흔 몇 살이야? 뭣이라구? (마호메트입니다) 만나 봤어? (못 만나봤습니다)


이제는 여자들이 벌거벗고 좋아 춤추고 사는 때가 될 테니 그때를 생각하고, "나 벌거벗었으니 나타나서 춤춥시다" 하면 그림자 춤이 실체로 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모시는 데로 따라와서 남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 맨 처음에는 오빠가 되어 주는 거예요. 오빠에서 복귀되어 가지고, 남편까지 올라가야 돼요. 키워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지상에서 외롭게 사는 것입니다.


* 임자는 공산세계에 관계되어 있는 여자야. 그러니 회회교하고 가까운 거야. 그래서 다 인연이 되니까 그렇게 묶어 준 거야. 가만히 보니까 정성을 제일 많이 들였더라는 거야.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겠다고 이름 붙은 사람들이 말이에요, 정성을 많이 들여요. 공자 부인도 그렇고 석가모니 부인도 그렇고 말이에요, 그다음에는 뭐예요? 소크라테스 부인이 조금 낫더구먼. 정말이에요. 그거 다 영계에서 보니 그래요. 그래서 내가 불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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