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노정

해방 전후의 섭리 - 거기서 나는 만세를 못 불러봤어요.

true2020 2017. 1. 27. 15:13

1990.12.30(일) 본부교회.

25세 전후를 중심 삼고는 전국에 있는 신령한 사람들을 다 답사했어요. 이름 있는 목사들과 이름 있는 사찰, 역술가 등 전부를 답사한 거예요.

 

답사하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신앙관과 내가 알고 이는 신앙관을 비교하면서 이론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 목사들을 대해 가지고 "타락이 뭐냐?"고 질문을 하면 누가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타락됐느냐 하는 것을 몰라요. 

 

* 그렇기 때문에 타락이 어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부 아는 관점에서 수많은 신령한 사람을 만나봐도 그들은 그거 다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때가 되지 않았는데 발표할 수 없고 또 그때 당시 일제 밑에서 탄압받는 기독교의 신앙가로서 열렬하게 되면 투옥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하교회를 중심 삼고 답습하던 그런 한때가 있었어요. 그때는 감옥으로 다 가고 만주로 도망가고 시베리아로 도망가는 이런 신앙의 길을 찾아 자기 고향을 떠나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 그러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25세였어요. 해방이 되니까, 세계로 퍼졌던 애국지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이른바 일본 계열, 미국 계열, 소련 계열이 들어온 거예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공산당 김일성이가 나오고, 김구 선생, 이박사, 또 중국파들을 중심 삼고 싸움판이 벌어지는 이런 혼란 시대가 된 것입니다. 

 

거기서 나는 만세를 못 불러봤어요. 남들은 다 해방이 됐다고 좋아하는데 손을 들고 싶어도 손이 안 올라간다 이거예요. 여러분들은 그런 것을 모를 거예요. 입이 만세가 불러지지 않아요. 그래서 앞으로 한국의 갈 길이 상당히 어려울 것을 알고 여기에 대비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 1968.3.29(금)전본부교회. 제9회 참부모의 날. 

한국 민족도 8.15해방 후에 좋다고 춤을 추었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바라보고 골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슬픔으로 뒤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1988.8.28(일) 나라의 부리와 향토애. 한남동.

- 향토학교 간사.

 

181-066 선생님은 해방을 맞이하고도 만세를 불러보지 못했어요.

 

* 재탕감 길을 가야 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기 길을 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