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1959.7.5(일) 전본부교회.

true2020 2016. 12. 20. 15:41

1959.7.5(일) 전본부교회.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007-014 지금 이 세계의 인류는 평화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유를 누리는 개인이 되어 자유의 사회, 자유의 나라, 자유의 세계에서 살기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없고 내 마음에 자유가 없고서는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다운 평화 속에서 참다운 자유를 구가하며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랄 것입니다.

 

* 오늘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이구동성으로 이 세계는 평화의 세계가 못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나 심정에서 우러나 살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이 못 되어 있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 인간은 이념적으로 고대하는 행복의 자아가 못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007-016 그러면 인류가 고대하는 곳은 어디일 것이뇨?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본향의 세계 즉 그곳에 간 후에는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은 세계,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은 세계, 한번 느낀 감촉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계, 영원히 웃을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 한 주인을 찾았다면 그 주인을 영원히 놓칠 수 없다 하는 세계, 그런 한 곳이 있어야 합니다.

 

007-018 그런 곳이 심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개인이 살 수 있는 곳이요 그러한 본향이 인류 역사의 종말시대에 소개되어야 할 곳입니다. 그렇지 못할진대 오늘날 이 세계는 수습하려 해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소개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주의를 논리적인 견지에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본향의 세계, 본향의 땅, 본향의 형제, 본향의 가족, 본향의 친척, 본향의 동산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007-022 본향이라 하면 여러분들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본향에는 반드시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사랑하는 마을이 있고 사랑하는 집이 있고 사랑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멀리 외국에 가 있게 되면 그 본향의 범위는 넓어져서 조국, 나라까지 본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우주, 천주란 견지에서 보면 이 세계가 나의 본향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그 본향의 범위도 비례적으로 커간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생활 과정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007-023 그러면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은 어떤 곳이뇨? 여러분이 어느 어느 곳이 내 고향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곳이 아닙니다. 본향. 마음의 본향, 그곳은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 심정의 안식처, 심정 세계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 자기의 진정한 본향은 어디에 있느뇨?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음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그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엉클어져 있기 때문에 그 본향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본연의 마음과 인연 맺을 수 있는 본향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고 본향의 동산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곳,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역사가 바라고 있는 참다운 행복의 동산은 이런 곳이라고 소개할 수 있고 참다운 평화와 참다운 자유를 소개할 수 있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신 것인고? 생각해 보세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가? 높고 크고 존엄하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대하던 주님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성신이 그곳에 계실 것이며 역대 섭리사에 왔다 갔던 수많은 공신들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또 세계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충신이 그곳에 계실 것이며 세계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효자 효녀 열녀들이 그곳에 계실 것입니다. 

 

007-023 여러분 중에 나이가 7, 80살이 되어 노숙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체를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본향의 동산과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염려 중의 염려요, 근심 중의 근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본향은 어떠한 곳이뇨? 그곳을 찾아온 자를 대하여 환희의 팔을 벌리고 맞아 주는 그런 곳을 말합니다. 그곳이 그립습니다.

 

여러분이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는 억울한 사정, 비통한 일 혹은 분하여 참을 수 없는 입장에 서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기 위하여 나선 몸이기에 그러한 사정은 필히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돌아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적인 모든 위훈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인생길을 개척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도주들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이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기 전에 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할 우리입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늠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심정과 마음의 중심을 가졌느냐,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걸어 놓고 문답해야 할 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007-025 본향, 그곳에는 그리운 부모가 계시고 그리운 형제가 있고 그리운 산천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을 그리워하여 찾아간다면 기뻐하지 않을 존재물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오늘 내 생활이 처량하구나, 오늘날 내 생활 행로가 비참하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이니 여기에 억울함이 있고 분함이 있고 눈물을 지으며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할지라도 본향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잊고 쓰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 반대를 받아 밀려나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반대와 핍박이 무서워서 고요한 산천을 찾아가서 기도의 시간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압정이 두려워서, 십자가의 길이 두려워서 가야 할 인생길에서 돌아서고자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에서 어떠한 입장 하에서도 가야 했고 어떠한 불쌍한 처지에서도 가야겠다고 각오했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본향의 심정을 느끼고 본향의 사정을 아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았어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쌍한 아버지가 웃으실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사모하고 붙들고 싶었던 그 심정을 아시고 나를 붙들고 울어 주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인생길을 가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비참한 환경에서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함을 당하는 사람,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하고 본향을 찾기 위하여 그러한 길을 걸어 나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그 사람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007-027 오늘날 세상에서도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서는 천리길도 멀지 않다 하고 달려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만리길도 마다않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거든 본향의 동산을 찾아가는 여러분이 그만도 못하다면 반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간 생애의 어느 한 기간에서 본향길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까? 그런 데에 무책임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007-031 본향에 찾아가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자신을 갖고 심정적으로 취해 갈 줄 아는 자가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하나님이 있다면 심판날에 이런 사람을 호출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갖고 취해서 간 사람은 역사가 擁護해 줍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취해 살다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007-039 우리는 본향 땅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첨부해야 할 말씀은 "나는 사랑이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빼놓았습니다.

 

007-040 이제 여러분이 있고 싶고 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본연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식구와 식구들은 형제입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상처를 입으면 그 상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래야 됩니다. 우리 식구 중 누가 상처를 받게 되면 가슴이 메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의 본향 집은 어떠한 곳이뇨? 아버지께서 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께서도 같이 우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한 부분도 빼지 않고 동반자의 입장, 친구의 입장 혹은 신랑의 입장에서 대해 주시려는 하늘이라는 말씀, 고맙고 惶悚 황송(분에 넘쳐 고맙고도 송구하다.)한 말씀입니다.

 

"불초한 것을 모시고 주님이 울어 주시다니, 아버지께서 그러시다니 황공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내 인생행로에서 상처 받은 모든 일체를 잊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려야 할 수 없이 큰 아버지의 사랑의 노래하는 감정이 앞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학기초에 처음으로 타향에 온 학생들은 학기말이 되면 고향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고 본연의 심정이라면 자기가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손을 붙들고 눈물지으면서 자기의 지나온 사정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워 가며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자리, 그 마을, 그 산천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복귀의 한을 풀지 못한 우리, 우리에게 인생행로를 걷는 과정에 있어서 "오 주여! 아버지여!" 하는 순간에 온 천지만물이 기쁜 가운데에 "옳소이다. 할렐루야!" 하고 환호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어야만 됩니다. 있어야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없다 할진대 하늘이 서러운 입장에, 불쌍한 자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자는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자식이 좋다는 것은 무엇이뇨? 부모가 어려울 때, 부모가 눈물 지을 때 같이 울어 주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또 부모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같이하고 기쁨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구 중심 삼고 자랑하지 마세요. 나를 위하여 죽을 때 울어 주고 슬플 때 같이 울어 주기 힘듭니다. 그럴 수 있는 분은 부모입니다. 하늘은 그런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