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정석천 장로

true2020 2016. 7. 27. 10:11

▣ 정석천 장로 (정수원 선생의 아버지)


* 先親(정항준)은 5형제 중, 세째로 태어나, 철산 고을에서 벼슬을 한 분이다.


* 아버지는 3번이나 결혼을 했다. 첫째 어머니는 딸 하나만 낳았고, 둘째 어머니에게서 두 아들을 얻었다. 세번째 어머니가 김성도. 그때 아버지가 45세, 김성도 어머니가 18세였다.

김성도 어머니는 둘째 어머니에게서 모진 구박을 받으면서도 대를 이을 남자 아이를 낳기만을 고대했다.

다행히 첫아기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 아기는 쇠고기를 잘못 먹어, 채해서 죽었던 것이다.

이 남자 아기가 밤에 죽고, 딸 애기가 새벽에 탄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는 이 딸아이에게 쏠린 것이다. 이 아이는 다음날 이웃 할머니에게 맡겨져 밥물을 먹고 자랐다. 이 딸아이가 나의 누님인 정석온 권사였다.

그다음에 어머니는 또 딸 쌍둥이를 낳았다. 그후 冷待로 설움 속에서 지내던 어머니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나였던 것이다. 이때가 1906년 6월 25일.


* 전통적으로 우리 가정은 유교를 신봉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기를 낳고 정신이상이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무당을 부르고, 병원을 찾는 등 갖가지 수단방법을 다 썼지만 치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노권사라는 전도사가 와서, 이 병은 예수를 믿어야 낫는다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안수기도, 특별정성을 쌓았다.

3개월 후 병이 완치되었는데, 이것이 교회에 연결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때 어머니 나이는 33살이었다.  1년 후 내가 또 병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이때도 기도받고 낫게 되자, 그것을 계기로 신앙심이 더욱 돈독해졌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모진 逼迫을 받았다. 

어머니의 병이 完治되자 당장 교회 나가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다. 혹시 교회에 나갈 양이면, 매를 맞을 각오를 해야 했다. 자녀들은 혹시 어머니가 매를 맞아 돌아가시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결국 아버지는 중풍을 얻어 6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 담임 목사가 남녀 문제로 立件을 당하게 되어 큰 衝擊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죄에 대하여 깊이 파고 드는 기도생활을 시작했다. 매일같이 금식기도, 철야기도로 성경상의 난 문제를 풀기 위해 애썼다.


* 1931년 2월에는 딸 석현에게서 성신의 역사가 시작되어, '새주님이 나타났으니 회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계시가 내려, 전 식구들이 3일 금식을 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벌어졌다. 이때 모든 사람들은 이 어머니로부터 기도를 받음으로써, 생명의 자유를 찾는다고 믿었으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새주님 오심을 찬양했다. 


* 우리 집에는 매일 10여명의 환자들이 몰려와 안수기도를 받았고, 예배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이 집회의 열기가 계속되자, 총독부에서 간섭하게 되었다. 해산명령을 받고, 정차를 거쳐 1935년 10월에 총독부 종교과로부터 성주교단이라 이름으로 허가를 받았다. 


* 성주교단의 中心 敎理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要約할 수 있다. 

1) 죄의 뿌리는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 먹은 것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남녀관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났다. 즉 음란이 타락의 동기가 되었다. 

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 않고 뜻을 이루어야 한다. 

3) 하나님에게 슬픔

첫째, 아담이 타락하는 순간을 아시면서도 간섭하시지 못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으셨던 슬픔.

둘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 하나님을 뜻을 이루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시는 슬픔이었다. 

4) 재림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몸을 통해서 오신다

5) 재림주님은 한국으로 오시며, 만민이 한국을 신앙의 종주국으로 알고 찾아오게 된다. 


* 집회가 공식화되자, 전도사업에 박차를 가해, 정주, 안주, 평양, 원산, 해주, 서울 등지로 뼏쳐 나갔다. 그해 어머니 등 신도 1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獄苦를 치르게 되었으며, 어머니는 監獄에서 병을 얻어, 3개월 만에 출옥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1944년 4월 1일 62세 일기로 타계하게 되었다.


*  일본의 宗敎彈壓, 해방 후, 공산당의 宗敎抹殺 政策으로 성주교단은 以南으로 옮겨져, 가정에서 예배를 보기에 이르렀다.


* 우리 집안은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나는 일찌기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가서 농장과 精米所를 경영한 적도 있다. 성주교단을 창설할 때는 내가 법적인 대표가 되었고, 목사로서 안수도 받았다. 그러나 성주교단이 탄압을 받게 되자, 재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1944년 6월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서진 광산을 인수하여, 경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금광에서 노다지가 나오는 등 톡톡한 재미를 보았지만, 가면 갈수록 운영이 부실하게 되어, 돈이 많이 들었고, 38선이 생겨, 고향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도 없어, 더욱 어려운 상태에 직면하게 되자, 이 광산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 입교 후에 선생님의 지시로 유효영 씨들과 재개발을 하게 되었다. 서진광산은 협회에 獻納한 뒤에 財團 登錄에 이바지하였다.


* 그 후에는 다시 대구 동성로에 집을 마련하고, 쌀과 석유 장사를 시작했다. 본래 사업에 경험이 있던 터라,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대구에서 6.25 동란을 맞이했고, 입교하기까지 이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는 어머니의 遺言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이 뜻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룰 것이다. 그 대신자도 나와 마찬가지로, 淫亂集團으로 誤解를 받아 逼迫을 당하고, 獄苦를 치를 것이다. 그런 교회가 나타나면, 참된 교회인 줄 알고 찾아가라.' 


* 나와 누님 정석온 권사는 어디에서 이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찾아 다녔으며, 1955년도에 들어와서는 초조한 심정으로 쌀 한 말과, 소금 한 줌을 가지고 산 기도를 할 계획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新聞에 난 退學事件 한 토막을 읽게 된 것이다.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이화여대에 다니던 女大生 14명이 退學을 당하게 된 記事였다. 

뭔가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직감한 나는 부산에 있는 누님 정석온 권사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누님과 철도국에 다니는 딸이 신문조각을 들고 무조건 상경했다. 신문에 난 대로 장충동 부근에서 서울통일교회를 찾아 헤맸다. 마침 경찰관이 있어서 그에게 물어 용케 찾을 수 있었다.


* 당시 이화 여대생 부모들이 찾아 오는 등 교회가 어수선해서 선생님은 만나지 못하고, 강현실 씨를 만나 부산교회를 소개받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대구에 있는 동생인 나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나 또한 대구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1주일간 원리강의를 듣고 입교를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날이 1955년 6월 25일이다. 나는 성주교단에서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구체적이요, 성서적인 면에서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우리 일가의 입교는 당시 핍박받던 시절의 식구들에게는 큰 격려가 되었다. 가족 전체가 복귀된 식구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온 터였다. 경제적으로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교회를 도울 수 있었다. 더군다나 공산정권으로부터 모진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집단의 사정을 알 수 있었고, 그들과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입교한지 10일 만에 선생님의 투옥이란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강현실 씨가 이 사실을 대구에 와서 알렸고, 이요한 목사 또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30여 명 되는 대구 식구들과 한 마음, 한뜻이 되어 기도생활을 하면서, 서울에서 기쁜 소식이 오기를 焦燥(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러던 중 더 기다릴 수가 없어, 나는 상경하여 꿈에 그리던 선생님을 직접 면회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철산의 새주파에 대한 사실을 아시고, 여러 가지 내용을 물으시며 인자하게 대해 주셨다. 


* 이미 부산 시절에도 선생님께서는 김원필 씨 등 부산 식구들에게 '새주파' 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김성도 할머니 후손들이 이남에 와 있다는 데, 찾아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 선생님은 10월 4일 무죄로 석방되셔서, 그달 25일 대구에 내려 오셨다. 이때 선생님께서 동성로에 있는 우리 집을 방문하셔서, 식사를 하시고, 기도를 해 주시기도 했다.  


* 나의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게 된 것은 1956년 6월 8일이다. 이것은 서울에 올라오기를 원하시는 선생님의 뜻에 의해서이다.  청파동 교회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동자동에 새로 지은 집이 있어서 계약을 했다. 전세로 얻기 전에 선생님께서 와 보시고, 계약해도 좋다고 허락을 하셨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함께 거처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면서, 이사하는 과정을 보살펴 주신 것이다. 당시 집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선생님 방은 2층에 있었다. 또 성진 씨와 김원필 씨가 2층에서 한 방을 사용했고, 옥세현 씨도 아래층에 거처했다. 선생님께서는 거의 매일 오시다시피 오셔서, 영어 공부를 하시는 등, 많은 큰일들을 앞에 두시고 준비를 하셨다. 교회는 사람이 많이 분주한 반면, 이곳은 조용하게 여러가지 일을 구상하고, 개인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 


* 이렇게 선생님이 계시자, 나의 집이 교회처럼 또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다. 부인회, 장년회, 학생회 등 각 속회를 이곳에서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내인 김선영 권사는 교회에서 선생님의 식사를 만들고, 나는 경제적으로 교회를 돌봤다. 


* 1957년 이후에는 교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체계적인 사회활동이 필요했다. 그럴 즈음 문용선씨 일가(용기, 용현) 이 입교하여, 1956년 4월 5일 충남 아산군 인주면 대음 2리 145번지의 4의 토기 공장을 천주교회로부터 인수하여 경영하게 된 것이다. 이때 문용선 장로 일가가 이곳으로 이주하고, 전보득씨 등 10여 명이 참여하게 되었다. 식구들로부터 자금을 협조받고, 나 자신이 갖고 있던 돈도 많이 투자하여 뒷바라지를 했다. 나의 사업 수완이 이곳에서 발휘했다. 인주교회도 여기에 종사하는 식구들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1957년 7월에는 선생님이 직접 내방하셔서 격려해 주었다. 선생님은 며칠간 머물면서, 낮에는 아산만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시고, 밤에는 식구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내리셨다. 1959. 2. 4과 그해 4, 5, 6월에도 찾아오셔서 경영상태를 점검하시고, 식구들을 격려하셨다.


* 대음리에 자리한 토기공장은 온양에서 1시간 남짓 버스로 달려서 이르는 곳으로부터, 1시간 가까이 다시  걸어야 도착하는 奧地에 있다. 이런 오지에까지 선생님이 발걸음을 한 달이 멀다하게 자주 하신 것은 이 사업에 얼마나 기대가 크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1960년 11월부터 인주교회 인도자로 부임했다. 이 인도자 생활을 1961년 9월까지 계속했다.


* 1959년에 접어 들면서 인화실업이라는 제빙공장을 인천에서 인수, 경영하게 되었다. 워낙 노후한 시설에 경영의 경험이 없는 노인이 경영에 실패, 이것을 일정한 조건하에 경영을 맡게 되었다. 이때 동역한 식구들은 사장에는 나, 전무에는 유효민씨, 공장장에는 유효영씨 등이다. 이 공장은 운영불능상태에 빠진 것을 교회에서 위탁받아 천신만고 끝에 살려냈다. …공장의 보수와 운영비도 뽑지도 못했는데, 큰 이익이라도 본 것으로 여기고, 강패 조직까지 동원해 쳐 들어와, 내놓고 물러나라는 것이다. 다 죽은 기업을 살려놓으니까 고마워 하는 대신, 도둑놈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 1956년 10월 14일 성화 장년회가 결성될 때는 사업부장을 맡았다.

* 1956년 7월 1일 제3회 협회 원리시험에 합격했다.


* 나의 첫째 부인 최애선씨와의 사이에서 정수원 등 2남 1녀를 낳았는데, 최씨가 타계하여, 다시 1944년 김선영씨와 재혼하게 되었고, 1963년 2월 8일 기성가정 축복을 받았다. 김선영 권사와의 사이에는 용원(6천가정), 경희(1800가정), 경심(6천가정), 은복 등이 있다


* 성주교단에서는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입교 후에 선생님께서 장로라는 직분을 주신 것이다.


* 묵시록을 보지 않고 외울 정도로 성경을 수없이 耽讀(탐독)했고, 원리강론을 읽었다 하면, 단숨에 끝까지 내리 읽었다. 


* 청량리로 노방전도를 나가려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거기에다가 고혈압까지 덮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