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자녀. 2세

성진 님 - 1946.3.1(양4.2) 탄생

true2020 2016. 6. 9. 17:37

* 1946.3.1 (양 4.2) 탄생

* 1973.7.18 (음 6.19) 일본에서 성혼

 

1. 성진 군의 축복을 왜 일본에서 했느냐?

 

▣ 1973.7.29(일) 전본부교회. 

성진 군의 축복을 왜 일본에서 했느냐? 일본은 해와 국가로서 모자 협조의 기준을 마련해야 되는데, 그러한 책임을 할 때을 놓쳐 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해 주기 위해서 성진 군을 일본에서 축복해 준 것입니다.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2. 그는 23살이 되도록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 1969.2.2(일) 전본부교회.

- 제2차 세계순회노정 떠나시기에 앞서.

 

선생님이 수십 성상의 복귀 노정을 걸어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먼저 그러한 역사 노정을 걸어왔기 때문에 선생님은 부모를 사랑할 수 없었고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처자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 성진이가 왔는지 모르지만 그는 23살이 되도록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의 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선생님이 누구만큼 못나고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적 인연이 더 급해기 때문이었습니다. 23년 전 그 어린 핏덩이와 어머니를 남겨 놓고 북한으로 가기 위해서 문을 닫고 나설 때, 그 어머니에게 어디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집을 떠나야 하는 심정은 하나님만이 아실 거라고 믿고 떠났던 것을 그는 몰랐을 것입니다.

 

만일 그때 기성교회가 환영하였더라면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는 슬픈 아버지 어머니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성교회가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통일교회의 운명이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도 이렇게 비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3. 가정을 위한 길을 갈 것이냐, 공적인 하나님을 위한 길을 갈 것이냐?

 

▣ 1969.6.3(화) 청평 수련소. 2차 청평 수련회.

평양으로 가기 두 달 전에 성진이가 탄생하여 선생님은 김백문의 문산 집회에 참석하고 그 수도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쌀을 사 가지고 오려고 출발했는데, 그 도중에 북한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곧바로 평양으로 갔다.

 

▣  1970.8.11(화) 부산 동명장 여관. 전국지구장 수양회.

사실은 내가 이 길을 출발할  때에 어떠한 작정을 하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성진이가 있지만 성진이 어머니가 스물한 살인가 스물두 살 때 일입니다.

 

일가친척도 없고 쌀은 다 떨어지고 돈도 한 푼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새벽같이 배낭을 짊어지고 황해도 백천으로 쌀을 사러 가던 중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가정을 위한 길을 갈 것이냐, 공적인 하나님을 위한 길을 갈 것이냐? 거기에서 딱 잘라 "하늘을 위한 길을 가는 거다" 해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북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런 고비가 있는 거예요.

 

이북으로 가서도 집으로 편지 한 장 안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편지를 하면 좋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깨끗이 청산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거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통일교인들도 가정을 버리고 재산을 다 바치면서 나갈 수 있어야 됩니다.

 

4. ▣ 성진이는 아담형이고 희진이는 예 수형이고 효진이는 재림 주형입니다. 즉 소생 장성 완성입니다. 

 

5. 나는 성진이 어머니와 7년 만에 만났었습니다.

 

▣ 1970.8.29(토) 전본부교회

- 1970.7.20~8.29 40일 하계 전도를 마지고 돌아온 부인 전도대원에게 하신 말씀. 

 

선생님은 성진 어머니와 성진이를 놔두고 이북으로 떠났습니다. 갈라지는 놀음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갈라진 기준을 중심 삼고 다시 찾을 때까지 탕감 조건을 세워 나온 것입니다.

 

재림 역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북은 영계와 낙원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때를 맞기 위해 기도하면서 새로운 터전인 이남에 내려올 것을 꿈꾸었습니다.

 

* 나는 성진이 어머니와 7년 만에 만났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7년 동안 고생시키더라도 끝까지 감사하면서 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복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을 못 할 때에는 탕감 역사가 남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책임을 못하면 여러분의 아들딸까지 걸려 들어갑니다.

 

6. 성진이가 일본에 갈 때, "자기 영광을 위해서 움직이지 말라"

 

▣ 1970.9.6(일) 전본부교회   

종교 활동을 위해 내가 대한민국에서 돈을 제일 많이 씁니다. 굶으면서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 기분 좋아요, 나빠요? 

 

*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선생님을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것을 전부 다 세계적입니다. 선생님은 어머니가 죽어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이번에 성진이가 일본에 갈 때도 "그 나라에 가서 다른 것은 하지 마라. 이것 이것을 하라. 너는 일본 국민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네가 잘해서 아버지 위신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 가장 중요한 첫째 문제는 대교회 문제이고 둘째는 대국가 문제이며 셋째는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문제이며 넷째는 남녀 문제인데, 이 문제를 중심 삼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육은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7. 그 성진이를 김원필이한테 맡긴 것입니다.

 

▣ 1970.12.22(화) 통일교회의 현재의 입장. 전본부교회.

- 제15회 전국성화학생 특별총회.

 

037-053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사랑을 받고도 교회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나라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와 나라에 연결시키는 일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을 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다시 돌아와야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성진 어머니가 천 년 사연의 한을 극복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참아 나왔더라면 오늘 선생님 가정에 불상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날에는 자기 부모라고 해서 부모를 모실 수가 없습니다. 남한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도 처자를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다시 탕감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그래서 성진이는 지금까지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이 길을 다시 닦아 1960년에 성혼식을 할 때까지, 부모의 자리에 설 때까지 성진이와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그 성진이를 김원필이한테 맡긴 것입니다. 그것은 성진이가 가인적인 장자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통한 역사가 벌어진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아내가 있어도 아내를 만날 수 없었고 자식이 있어도 자식을 만날 수 없었으며 부모가 있어도 부모를 찾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평양에 갔을 때 거기서 한 시간 반이면 고향 집에 갈 수 있었지만, 집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나오기를 그렇게 고대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다리던 부모 형제를 찾아가지 못하는 서글픈 탕감의 노정을 걸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를 사랑하고 처자를 사랑하는 것 이상 사탄의 아들딸을 더 사랑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 1971.4.18(일) 시련과 성장. 구리시 교문동 통일동산.

- 부활절 기념 서울지구 합동 야외예배. 예배 후에는 식목행사.

 

043-054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진이가 대학을 나올 때까지 내가 성진이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 한번 못 해 봤습니다. 이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녀석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기 전에 나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틀렸거든 총칼을 들고 아버지에게 대항하라. 나는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뜻 앞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선 앞에 악은 자연 굴복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늘 앞에 책임을 다하고 하늘을 공경하는 환경을 걸어왔기 때문에 여기에 아무리 불평불만의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또 과거에 잊을 수 없는 한을 엮은 소원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자식을 붙들고 소원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십니다. 이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1971.8.13(금) 우리의 사명과 책임. 청평.

- 제1차 교회장 수련회.

 

046-133 선생님이 성진이와 성진이 어머니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새로운 원수의 세계를 향하여 7년 노정을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가야 되는 거라구요.

 

그 기준은 뜻을 이루지 못한 입장이기 때문에 자식의 손목도 못 잡아 보았습니다. 나는 성진이를 대하여 "성진아" 하며 이마를 맞대고 다정스럽게 이야기를 못 해 보았습니다. 성진이는 아버지를 대해 가지고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기막힌 노름입니다.

 

성진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60년대까지 연필 한 자루 안 사 주었습니다. 옷 한 벌 안 해 주었습니다. 돈이 없어 그런 게 아닙니다. 그 반면에 통일교회 사람을 위해서는 내 뺘와 살을 깎아 가면서 감옥에 들어가 피를 토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내 자식은 제물로 바치면서 ···. 이런 정성을 들여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전통적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