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로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 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1904.4.4 ~ 1944.1.16. 경상북도 안동. 본명은 원록(源綠)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1929년에 출옥,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곳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노신(魯迅)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33년 9월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1935년 시조 「춘추삼제(春秋三題)」와 시 「실제(失題)」를 썼으며 1937년 신석초 윤곤강 김광균 등과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그의 시 발표는 주로 『조광』 『풍림』 『문장』, 『인문평론』을 통하여 194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시작 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하여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6년 『육사시집』이 발간되었다.
* 작자의 말년 작품으로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1945년 12월 17일『자유신문』에 동생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꽃」과 함께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