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6.5.16(수) 하나님의 자랑이 된 예수 그리스도. 전본부교회.
1. 믿음의 왕.
2. 하늘의 사랑의 원칙을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켰다.
3. 책임지는 왕자.
001-029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천지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의 실체로 지으셨습니다. 또 아담 해와를 천사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의 실체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가 만물 앞에 서면 만물은 아담 해와에게 경배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지어 놓으신 피조의 동산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어졌던 것입니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 앞에 자랑이 되어야 했던 만물의 가치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었고 무형세계의 가치의 중심으로 나타날 수 없었던 인간이 그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랑의 뜻으로서 하나님 대신 만물 앞에 나타나 화동의 중심으로서의 영광을 받아야 할 인간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인간 타락 이후 6천 년이 경과한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찾아오신 표준은 무엇이었던고?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고 형상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대신하고 천륜의 행사를 대신한 전체의 대표자, 하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를 찾아오셨습니다. 또 지금까지 이 하나의 뜻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도 수고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 년 만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었던가? 그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하고 외적 형상을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의 이념으로 세웠던 자랑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수행해야 했던 본래의 사명이었습니다.
001-031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먼저 무엇을 자랑해야 했던가?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타락했고 4천 년 동안 섭리 역사가 연장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연장된 4천 년 역사를 가로막기 위해 사탄 앞에 세운 하나의 중심이 뭐냐 하면 믿음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는 어떤 분이냐?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랑으로 설 수 있는 하나의 가치의 기준을 어디에서 세웠느냐? 4천 년 역사가 흘러오는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없었던 온 만민들 앞에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자랑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001-034 그다음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자랑하실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수천 년 동안 사탄과 싸워 나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비로소 승리의 왕으로 설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자랑하신 것입니다.
4천 년 동안 수많은 선조들이 이 땅에 와서 사탄과 싸웠습니다. 메시아를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사탄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4천 년 동안 사탄과 싸웠지만 사탄을 점령하지 못했고 사탄을 굴복시킬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사탄을 점령하고 굴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켰느냐? 하늘의 사랑의 원칙을 가지고 굴복시켰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알아야 돼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데는 사랑의 원칙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원칙은 어떤 원칙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 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신 외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30여 생애의 생활을 보면 어느 한 부분 효자의 생활이 아닌 부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서의 한 날의 생활은 밤이건 낮이건 어떤 시간도 떼어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에 알맞은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 위에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하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효자의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일생의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육신은 무시되더라도 만민의 구주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아버지여, 나 하나가 사라져서 당신이 4천 년 동안 참아 오신 사랑의 대신 존재, 당신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 그 사랑의 대가를 돌려 드릴 수 있는 효자가 되겠습니다." 하는 이 하나의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억천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러려야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중심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된 부자관계의 천륜의 힘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환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산상의 외로운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아셨고 4천 년 동안 고대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잘 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변치 않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서의 자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화신체로 온 피조만물 앞에 자랑했습니다. 사탄세계 앞에 자랑했습니다.
* 또 그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조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가? 예수님은 책임을 지는 왕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날 적부터 요셉의 집에서 목수의 일을 했지만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001-037 예수님의 생활은 전부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남아질 수 있는 책임을 땅 위에 완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30여 평생의 생애는 영원불변의 실적, 책임을 다한 실적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놓은 생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복음이 남아 있는 이상 그의 생애로 남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대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4천 년 동안 역사해 오신 뜻에 대해서도 홀로 책임을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책임을 대신하여 나서는 이가 이 땅 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책임을 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홀로 전체의 뜻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 외로워한 반면 더 큰 책임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체적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발판을 놓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30년의 준비 시대와 3년 실천 시대, 3일간의 완성 시대까지 예수님의 시선 앞에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과 그 토대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 드리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임을 절감하며 산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순간에도 이 책임을 잊어버린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산정에 나갈 때에도 온 만민이 비방하고 사탄이 조롱하는 그런 최후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맡은 바의 천륜의 책임을 홀로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책임 완수의 일념을 갖고 십자가의 고비를 넘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을 재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가 다시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서도 흩어진 제자들을 염려했고 무덤의 3일간에도 이 제자들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졌기에 부활하신 후 갈릴리 해변가로 제자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001-041 오늘날 우리들은 마음으로라도 믿음의 예수를 본받으라 할 때 "예, 그렇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승리하신 예수를 본받으라 할 때 "그렇소이다", 책임지고 계신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예, 그렇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는 것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책임지지 못하는 이런 세상에서 책임지는 것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聖'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탕감이 가는 길. 1967.6.4(일) 전본부교회. (0) | 2015.06.29 |
---|---|
신앙자의 자세. 1971.4.25(일) 전본부교회. (0) | 2015.05.13 |
악의 근거지가 어디냐? 1965.12.8(수) 원주교회. (0) | 2015.04.16 |
우리의 자랑. 1987.3.22(일) 벨베디아. (0) | 2015.03.13 |
생애 중 최대의 실적을 남기는 해가 되게 하자. 1960.1.1(금) 전본부교회. (0) | 2014.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