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박미자 사모님 간증 - 2007년 9월 3일. 나고야.

true2020 2023. 12. 7. 23:26

◑ 박미자 사모님 간증 -  2007년 9월 3일. 나고야.  

- 송영석 榮錫 회장님과 430가정 축복 

 

▶ 宋 榮錫 総会長 略歴

1943 12 22日  全羅北道 扶安 出生

1961 9 5日   世界基督教統一神霊協会 入教

1968 2 22日  430家庭祝福 朴美子 女史との間に21

<学歴>

1963 2 19日  全北群山師範学校(現在・教育大学)卒業

1979年      統一神学校 牧会学科卒業

1993 9 10日  米国ネバダ州TIBS大学 神学博士学位取得

1994 2 18日  湖元大学校 貿易学科卒業

2003 2 19日  鮮文大学校 神学専門大学院碩士(修士)卒業

2004 6 26日  米国統一神学大学院(UTS) 修士卒業

2005 2 16日  鮮文大学校 名誉神学博士学位取得

<職歴>

1982 11 1日  本部教会 主席副教会長

1985 5 1日   忠南教区長

1986 6 1日   全北教区長

1994 6 1日   米国UTS留学

1995 5 12日  南米開拓 アルゼンチン国家メシア

1998 1 16日  日本 千葉~北海道 北部圏会長

2003 9 5日   日本首都圏会長

2003 11 1日  関西圏会長

2005 2 17日  韓国世界基督教統一神霊協会維持財団 事務総長

2005 3 4日  訓読会生活圏定着運動本部 本部長

2005 5 1日  世界平和統一家庭連合 副会長

2007 6 17日  日本特別巡回師

2008 10月   ハワイ摂理責任者

2009 2 19日 日本・全国祝福家庭総連合会 総会長に就任

現在に至る

 

日本語版 著書 「神様が惚れ込む者となれ」「楽しい教会 希望の伝道」「絶対信仰は運命を変える」

 

 

◑ 박미자 사모님 간증 -  2007년 9월 3일. 나고야.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이 귀한 시간에 여러분을 만나서 간증을 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쁩니다.. 또 그런 반면에 여러분이 더 해와 국가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며 항상 수고하시는 여러분에게 제가 무슨 간증을 해서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줄까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기도 합니다.

 

저희들이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할 적에 아버님께서 늘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너희들이 한국에서 일본 식구들 이상으로 고생하지 않으면 일본 식구들 앞에서 간증할 자격이 없다"라고” 항상 말씀하시면서 일본 식구들 이상으로 고생을 하고 눈물을 흘리고 또 수고를 해야만 할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을 항상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어렸을 적에 일본에서 우리 한국 선배 가정들이 일본 식구들을 지도하고 계실 때 "저분들이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셔서 일본 식구들을 지도하고 계실까, 나는 언제 그런 때가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어느덧 저도 육십을 넘고 보니까 여러분 앞에 서서 이렇게 간증하는 날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는 1959젼 13, 국민학교 6학년 때 통일교회에 입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7, 8년 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뜻을 알아서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기보다는 저희 어머니가 먼저 뜻을 알았기 때문에 저희 친정어머니로부터 손목을 잡고 처음으로 통일교회에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감리교 기성신앙을 13년간 하시다가 통일교회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희 가정은 제 위로 오빠가 세 명 있었는데 그 오빠가 한 해에 다 죽었어요. 7살 5살 3, 일 년에 오빠가 셋이 다 죽었어요. 그다음에 저를 낳았는데 저를 낳고 제 밑으로 동생을 낳으면 죽고 낳으면 죽고 해서 저를 중심 삼고  앞뒤로 다섯 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제 밑으로 동생은 여동생 셋과 남동생 하나를 더 낳았어요. 위로 오빠가 셋 죽고 동생이 둘 죽으니까 저도 죽을까 봐 저희 집에서는 저를 땅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항상 손위에서 키우듯이 그렇게 귀하게 키우셨습니다.

 

저는 고향이 충청북도 제천시에서 태어났는데 그때 저희 가정은 굉장히 부자로 살았습니다. 시골에는 많은 토지가 있었고 또 시내에는 가게를 여러 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옷 장사를 하고 신발 장사를 하고 쌀 장사를 하면서 참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런 가정에 부유하게 살던 때였어요..

 

그래서 제 아버지가 아들딸을 많이 잃고는 신앙생활을 하면 더 좋은 자녀를 기를 수 있다는 그 신앙심으로 기성교회에 입문하게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께서는  굉장히 신앙에 욕심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기성교회에 다니실 적에도 십일조를 하게 되면 꼭 남보다 천 원이라도 만 원이라도 더 하시는 분이셨고 또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시려고 하는 그런 욕심이 많은 그런 신앙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감리교 신앙을 하면서도 어떡하면 더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을까, 매일 새벽 기도를 다니시면서 "재림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재림주님이 오신다고 하는데 내가 제일 먼저 그 재림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면서 4킬로 되는 그 감리교회를 매일 새벽마다 기도회를 다니시는 분이셨어요.

 

그러던 가운데 어느 분으로부터 성경해석을 아주 잘하는 곳이 있는데 한번 같이 가 보자고 어느 분이 권유를 해서 따라가 본 곳이 바로 통일교회였습니다.. 가서 보니까 원리강의를 목사님이 하시는데 아주 평소에 궁금하고 또 알고 싶고 또 꼭 느끼고 싶었던 그런 내용에 원리강의를 하시는 것을 보고  저희 어머니께서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교회에서 그 원리강의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잘 가지 않고 교회에서 원리강의를 듣고 그러니까 저희 아버지께서는 반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니가 들어오실 적에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아요. 그리고 항상 때렸어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렇게 항상 때리니까 어머니 얼굴에는 멍이 들어 가지고 푸른빛을 항상 띠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면서도 그렇게 하늘 앞에 드리는 정성이 보통 정성이 아닌 그런 분이셨습니다..

 

60년도 초에 처음으로 한국에 전도가 시작되었어요. 그때는 아버님이 직접 지프차를 타시고 순회를 하시면서 전도 나온 사람들에게 차비를 주시고 또 격려를 해 주시고 그런 때가 60년도 초에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가 사는 고향 충청북도 제천에도 아버님이 오시게 되었죠. 제천교회에서는 저희 어머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어요. 부모님의 식사라든가 부모님의 필요한 것을 정성껏 준비를 하고 아버님을 기다리는 중에 저희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교회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내가 좀 더 정성을 들여야겠다" 하시며 빗자루를 가지고 길을 쓸기 시작한 것이 4킬로 길을 청소를 했어요.

 

지금은 길이 좋아서 아스팔트 길이지만 60년도의 대한민국의 길은 자갈밭이 아주 많고 안 좋은 그런 길이었기 때문에 청소를 하지 않으면 더러워서 다닐 수가 없는 그런 길이었어요. 아버님이 이런 길을 오실 수가 없다 하시며 저희 어머님이 4킬로의 길을 쓸고 나니까 새로 입은 치마가 앞이 다 떨어졌어요.

 

그때 아버님이 지프차에서 내리시면서 "아, 지금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는구나. 이제 가자" 하셔서 아버님을 모시고 교회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맛있게 차린 그 상을 바라보시면서아 참 맛있겠다 맛있겠다하시면서 그것을 하나도 안 잡수시는 거예요. 그거 왜 그러셨을까요. 

 

많은 식구들이 전도를 나가 있는데 내가 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겠느냐, 그런 의미에서 아버님께서는 하나도 음식을 잡수시지 않으시고내가 이것을 먹을 마음이 아니다하셨습니다.

 

저희 어머님은이렇게 정성 들여서 준비했는데 안 잡수시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럼 제가 싸 드리겠습니다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그 음식을 다 쌌어요. 그 음식을 싸서 차에 실어 드리고 아버님 이렇게 순회하시는데 얼마나 돈이 필요하시겠습니까하면서 어머님과 식구님들이 며칠 동안 그 돈을 모아서 지금으로 말하면 많은 돈이겠죠, 60년도이니까이니까. 그 돈을 아버님께 바쳐 드렸더니 아버님께서 그 돈을 가지고 계속 순회하시면서 전도 나온 사람들에게 돈을 주셨다고 그래요.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 어머님은 항상 신앙을 쌓아 가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보면 지금 일본은 좋은 집이지만 60년도의 한국의 교회는 방 하나를 세를 얻어서 방 하나에서 예배를 보는 그런 입장이었습니다. 교회를 볼 것 같으면 너무 작은 방에서 열 명도 안 되는 식구가 예배를 보는 것이 항상 죄송해서나는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있는데, 교회는 너무 어려우니까 가지고 있는 재산이 항상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님은 항상 교회를 가시면 기도 제목이 "우리 재산을 모두 하늘 앞에 바칠 수 있게, 우리 재산이 하루속히 하늘 앞으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늘 그런 기도를 하셨어요.

 

대개 기도를 들으면 어떤 분들은 “우리 집에 복을 많이 주십시오. 우리 집에. 많은 쌀이 들어오게 해 주십시오. 많은 금 은 보화가 생기게 해 주십시오” 복을 달라는 기도만 했지 우리 집의 복을 가져가 달라는 기도는 하는 분이 안 계셨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께서는 "빨리 우리 집을 하늘 앞에 바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빨리 저희 토지가 팔려서 하늘 앞에 바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항상 하시고 있던 그런 때였어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나 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저희 아버지를 비유를 맞춰서 협회수련을 보내서 협회 40일 수련을 받고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협회 40일 수련을 받고 오셔서 마음의 많은 동요가 되어서 아버지 어머니가 가족회의를 한 결과, 모든 재산을 하늘 앞에 바치기로 약속을 하고 이제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가 됐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은 재산이기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희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니 한 번도 반대와 핍박을 하지 않으시고 너희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그렇게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저희 집은 전 재산을 62년도에 한국에 총생축헌납이 나오기 이전에 초창기에 모든 재산을 하늘 앞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도 전도를 나가게 됐어요. 저희 4남매를 어디 둘 곳이 없잖아요. 어머니께서는우리도 전도를 나가야 되니까 한 3년 동안만 너희들이 고아원에서 커 주면 3년 뒤에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3년 동안만 고아원에 가서 자라거라하셨어요.

 

그런 가족회의 끝에 저희들은 모두 고아원에 가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고아원에 가는 날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이젠 고아원에서 살아야겠구나” 그런 마음의 각오를 하고 있는 차에 저희 할머니께서 마지막 말씀을 해 주셨어요. 모든 재산을 바쳐서 아무것도 없지만 너희 부부가 전도를 나간다고 하니까 너희 부부는 전도를 나가고 고아원에 맡긴 셈 치고 손자 손녀를 내가 길러 주겠다그렇게 말씀하셔서 저희들은 결국 고아원에 가지 않고 할머니 손에서 크면서 저희 어머니 아버지는 전도를 나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한국에 기성축복이라는 것은 참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7년 동안 성별을 해야 기성 축복을 받을 수 있었어요. 매칭 가정보다 기성축복이 축복받기가 더 어려웠던 것은 성별생활 때문이었습니다. 뜻을 잘 아시는 저희 아버지이시지만 남자이기 때문에 성별생활이 어려워서 가끔은 어머니 옆에 가고 싶어 하시고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면 저희 어머님은 항상 이불밑에 칼을 가지고 계셨어요.. 아버지가 가까이 오시게 되면 어머니는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내 몸에 손대면 나는 금방 죽는다”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성별생활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3년이 지났습니다. 뜻밖에 협회로부터 전보가 왔어요. 기성축복이 처음으로 있을 때였어요. 성별생활이 3년 반밖에 안 됐는데 기성축복이 있으니까 빨리 축복을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와서 협회로 올라갔더니 참부모님께서 특별 케이스로 축복에 들어갈 수 있게 허락을 해 주셔서 3년 반 만에 저희 부모님은 기성축복 처음 53가정의 축복을 받게 되셨습니다.

 

축복을 받으시고 이제 완전히 저희 부모님은 전도의 길에 나가셨고 저희는 자라서 저는 중학생이 되었죠. 저희 학생들은 중학교 3학년이 되면 수학여행, 졸업 여행을 가게 되어 있어요.

 

졸업여행을 가기 위해서 중학교 1학년때부터 조금씩 조금씩 저금을 했습니다. 많은 저금을 해 놓은 것이 있었는데 하루는 저희 어머니께서 오셔서얘 그때 졸업여행을 가려고 저금해 놓은 돈을 찾아왔으면 좋겠다. 졸업여행은 이번에 못 가면 언제든 다음에라도 갈 수 있은데 지금 모시고 있는 목사님이 72가정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축복비가 없어서 축복을 못 받고 계시니까 네가 졸업여행을 가려고 한 그 저금을 찾아다가 목사님 축복비를 대 드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셔요.

 

저는 아무 부담 없이 괜찮다고 하며 그 돈을 찾아서 72가정 축복 때 목사님의 축복비를 대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앞으로 뜻이 이루어지고 또 지상천국이 이루어지면 졸업여행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갈 수가 있고 일본도 갈 수 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닐 때가 오는데 그때 아무 조건이 없이는 그렇게 외국을 갈 수가 없다. 네가 여행을 안 가고 그 여행비로 목사님 축복비를 대 드렸기 때문에 그것이 조건이 되어서 너는 이다음에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어머니는 저를 위로해 주셨어요.

 

그때 저는 일본이 어디 있는지 미국이 어디 있는지 잘 몰랐고 세계를 내가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어머니는앞으로 뜻이 이루어지면 불을 때서 밥을 하지 않아도 되고, 손으로 쌀을 씻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쌀만 넣으면 밥이 저절로 되는 때가 오고, 빨래도 기계화가 되어서 기계로 빨래를 할 때가 오는데 그때가 바로 지상천국이 되는 때"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월이 흘러 세탁기가 나오고 전기밥솥이 나오고 그런 것이 외적인 지상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따르던 중 저희 부모님께서는 2세 동생을 낳았습니다. 그 당시 개척생활을 하던 때였기에 저희 식구가 먹고살아야죠, 저희들도 학교에 다녀야죠, 돈이 필요하니까 어머니도 아버지도 장사를 하셨어요. 아버지가 버는 돈은 교회에 헌금을 하고 어머니가 버는 돈은 저희 식구가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시는 장사는 별로 많이 벌리지 못했어요. 동생을 업고 장사를 하셨고 동생은 항상 어머니 등에 업혀만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아픈 것을 저희 가족이 아무도 잘 몰랐어요. 저희 동생은 기형아적인 그런 동생이었는데 3살이 되었는데도 걷지를 못하고 배만 맹꽁이 같이 나오고 다리도 나무젓가락처럼 가늘기만 한 그런 동생이 되었던 거예요.

 

주위의 사람들이 "아휴 애기가 이런 애기면 병원에 가서 고칠 생각을 해야지 매일 업고만 다니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했지만 병원에 데리고 갈 돈이 없어서 병원에는 데려가지 못하고 항상 저희 어머님은 하나님이 계시니까 우리 아기를 기억하시겠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생활을 하셨어요.

 

하루는 우리 식구가 "애기가 이렇게 아프면 또 특별히 2세인데 병원에 가서 고칠 생각을 해야지 업고만 다니면 되겠습니까" 하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그제야 "아, 내가 우리 아기 하나 때문에 통일교회가 욕을 먹으면 안 되겠구나. 2세가 이런 애기라면 안 되겠지. 병원에 가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동생을 서울대학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의사 8명이 저희 동생을 보면서 이런 병을 가진 애기는 지금까지 처음 보았다고, 그리고 만약 고친다 하더라도 엄청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서 저희 어머님은 동생을 업고 다시 집에 오셨습니다. 집에 와서는 한 3개월 정도 그냥 지났어요. 그러다가 식구들은 또 병원에 가 보라고, 가 보라고 하고 도저히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데리고 갔어요.

 

한국의 최고라고 하는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동생을 내려놓고이 아이를 고쳐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그랬더니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고쳐 줄 수가 없겠다고 하는 대답에 집에 가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등에 뜨거운 불이 들어오더래요. 등에 뜨거운, 화끈한 불이 들어오면서 거기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저희 어머니가 의사들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고, 의사들이 아니냐고, 의사의 직업이 무엇이냐고,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 의사의 직업인데 어찌 병든 사람을 놓고 돈만 따지고 있느냐고. 그럼 돈이 있는 사람은 병이 낫고 돈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되느냐고···. 당신네들은 가정환경이 좋아서 의대 공부를 했으니까 그런 환경에 태어났고 또 이런 애기는 당신네들 의사들이 고쳐야 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고, 저희 어머니도 생각지도 못한 그런 말이 나와서 의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어요.

 

의사들은 너무 당황해서 의사들끼리 영어로 회의를 했어요. 저희 어머니가 43세 때 제 동생을 낳아서 의사들이 볼 때 할머니로 보이는 거예요. “할머니는 왜 애기엄마가 안 오고 할머니가 애기를 업고 오셨습니까그렇게 물어요. 그러니까 “나는 할머니가 아니고 이 애기의 엄마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함으로 의사의 마음을 감동 감화시켜서 그 의사들이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를 무료로 고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로 저희 동생은 입원을 하고 3개월 동안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치료를 해서 지금은 아주 예쁘고 깨끗한 여동생이 되어 순전단도 졸업하고 좋은 대학도 나오고 축복도 잘 받고. 그것이 바로 제 여동생 박은선이에요.

 

이렇게 해서 저희 어머님의 역사로 기형아 일 수밖에 없는 동생을 온갖 정성을 다 들이고 모든 것을 뜻 앞에 맡긴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하늘이 역사를 하셔서 깨끗하게 나아서 동생은 지금 철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있던 가운데 여러 가지 신앙의 기도로써 많은 역사와 기적을 가지고 계셨어요  경기도 일대의 간증 순회사, 간증 순회사로 간증 순회를 하시면서 많은 식구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신앙의 경각심을 일으켜 주는 그런 순회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덧 참아버님의 회갑 60세 되었던 때 일이 또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님 회갑되기 1년 전에 "아! 이제 1년만 있으면 우리 참아버님의 회갑이 되는데 나는 무엇을, 참부모님께 선물을 뭘 드릴까? 그것을 1년 전부터 생각을 하시게 되었어요.

 

무엇을 선물로 회갑기념으로 드릴까. 집에 돈은 없고 선물을 드리고 싶고.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 생각해 낸 것이 조그만 돼지새끼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래서 돼지새끼를 사다 놓고 "돼지야, 돼지야. 너는 오늘부터 1년 동안 잘 자라서 참부모님 회갑 때 참부모님 밥상 위에 올라가야 되니까 그러니까 아프지도 말고, 병도 나지 말고, 깨끗하고 크게 자라서 우리 참부모님 입에 들어갈 수 있는 돼지가 되어 달라"고 돼지를 놓고 간절한 부탁을 드리고, 저희들 동생들과 저를 불러 놓고 이 돼지가 오늘부터 일 년 뒤에 아버님 밥상 위에 올라갈 때, 회갑 때 쓸 돼지니까 이 돼지한테 아주 잘, 아주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대하라고 하시면서 뭐라고 하시냐면 "이 돼지한테 밥을 줄 때마다 동산의 노래를 부르라"고 그래요. 그래서 저희는 밥을 갖다 주면 언제나 교대로 돼지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동산의 노래”를 불러요.

 

"주님 자기···학교 가야 되는데 밥을 천천히 먹어요.그럼 빨리빨리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노래를 빨리빨리 해요. 빨리 먹으라고주님 자기 동산에" "빨리빨리 좀 먹어" 그렇게 하면 저희 어머님이 오셔 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고 정성 들여서 노래를 하고 그래야 돼지라 밥을 먹어도 건강하게 먹지 빨리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고. 그런 정도로 정성을 들였어요.

 

그래서 그 돼지가 무럭무럭 자라 가지고 아버님의 회갑 때가 되었어요. 그때 한남동으로 전화를 했어요. "제가 일 년 동안 돼지를 길렀는데 부모님상에 꼭 이 돼지를  올리고 싶은데 이 돼지를 한남동으로 잡아가도 됩니까?" 그랬더니 한남동 부엌에서는 "안 됩니다" 그래요. "왜요?" 그랬더니 "아버님께서는 돼지고기 안 잡수시니까, 돼지를 안 잡아 와도 된다"고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는 1년 동안 동산의 노래를 불러 기른 돼지인데 한남동에서는 가져오지 말라고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는 협회장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협회장님께 전화를 해서 "제가 1년 동안 정성 들인 돼지를 한남동 부엌에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니까 내가 이 돼지를, 정성 들인 돼지를 한남동 부엌에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니까 내가 이 돼지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내가 잡아먹어야 됩니까?" 그렇게 전화를 했더니 협회장님 집이 그때의 김영휘 협회장님이 계실 때였어요 김영휘 협회장님이 "아, 잡아 가지고 오라"고.

 

그래서 제 어머니는 신나서 돼지를 잡아서 깨끗하게 해 가지고 한남동 부엌으로 가지고 갔어요. 한남동 부엌으로 가지고 갔더니 아버님께서 안 잡수시는데 여기까지 가지고 왔냐고. 그래도 일단은 해 드려 보라고. 정성 들인 돼지니까 꼭 좀 해서 안 잡수셔도 좋으니까 아버님 상 위에만 올려나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고는 집으로 오셨는데 가지고 온 돼지니까 한남동 부엌에서는 요리를 안 할 수가 없죠

 

그래서 그것을 요리해서 부모님 상에 식탁에 드리면서 "이 돼지를 길러 가지고 이렇게 와서 요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드렸더니 그 많은 반찬이 있는데 아버님께서는 제일 먼저 그 돼지고기한테 젓가락이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요리한 게 한 접시인데 3분의 2를 다 잡수신 거예요. "야! 맛있다. 맛있다" 드시면서 그 돼지고기를 많이 잡수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그 돼지는 일 년 동안 동산의 노래를 듣고 자란 고기였답니다. 그렇게 보고를 드렸대요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라던 가운데 신앙의, 누구 보다 더 모심의 생활이 철저했고 목회자를 모심의 생활이 철저했고 목회자를 모신 저희 집에서 그 옛날에 집이 부자였으니까 많은 식구들이 금식만 하려면 저희 집에 왔어요. 집에서 반대를 하니까 쫓겨와서도 저희 집에 살고, 금식하는 사람도 저희 집에서 살고,목회자들도 저희 집에서 모셨기 때문에 저의 어머니는 항상 부엌을 못 떠나셨어요

 

금식하고 끝낸 사람들에게 죽을 쑤어 주어야 하고 또 목회자님들 세 끼 꼭 따뜻한 것으로 해서 목회자를 드려야 되고 또 집에서 핍박받은 식구들이 있으면 그 마음을 위로해서 그 식구를 위로해야 되고 그런 신앙의 기준을 가지시고···.

 

그런 때에 어느덧 제가 축복 때가 되었어요. "이젠 우리 큰딸이 축복을 받아야 되는데 그냥 내가 가만히 앉아서 사윗감을 얻으면 안 되겠구나. 내가 특별정성을 들여야 되겠다. 그래야 좋은 사위를 얻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시고 저희 어머님께서는 40일 철야정성을 들이기로 결심하고 제목은 좋은 사위를 맞기 위해서 그래서 40일간 철야정성을 하시게 되었어요 

 

그래 성지 가서 철야기도를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 큰딸이 축복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위를 보게 되는데 저는 잘난 사위도 바라지 않습니다. 부잣집 사위도, 부잣집 아들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뜻 앞에 일편단심 뜻만 아는 그런 사위를 맞고 싶습니다. 이런 사위를 얻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만 40일을 그냥 철야를 드리는 거예요.

 

계속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모든 가정에는 큰딸 큰아들이 잘 되어야 그 동생들이 잘 된다는 저희 어머님의 신조가 있었기 때문에 저를 축복을 잘 바쳐야 동생들도 축복을 잘 받을 수 있겠다는 저의 어머님의 그 신념 하나로 40일 동안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약혼하러 서울 청파동교회로 가게 되었어요 그때 아버님께서는 송영석 회장을 저에게 약혼자로 베필로 맺어 주셨습니다  그래 처음에는 보니까 목회자도 아니고 공직자도 아니고 그냥 군인이었어요. 그때 당시에 군인하고 저는 약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같이 집에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니까, 저희 어머니께서는 한번 보시더니 벌써 이미 봤다고 40일 철야정성을 하는 도중에이게 네 사윗감이다라면서 저희 남편 얼굴이 나타났더래요. 그래서 이미 송 회장의 얼굴을 본 거예요 그러면서 "이미 며칠 전에 사윗감을 봤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군대 제대하면서부터 공직으로 나오면서 저도 목회자의 사모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사모학과를 나온 입장은 아니었고 또 목회자를 원했던 것도 아니었고 아버님이 해 주셔서 한 남자를 얻었는데, 그 남편이 목회를 하는 것이 자기 소원이라고 이야기하니까, 저는 어쩔 수 없이 목회의 길을 따르게 되었던 거지요

 

그때 제 나이는 굉장히 어린 때였어요. 430가정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목회자 사모의 길이란 어려웠습니다. 여러분이 봐서 알겠지만 송 회장의 신앙의 그 정성과 그 심정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 저는 따라가기가 굉장히 어려울 때가 많았어요 그러면서 그분을 따라가다 보니까 제가 힘들 때도 많았고 그 어린 나이에 뜻을 따르자니 이해 못 하는 일도 많이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이것이 하늘 앞에 한 남편을 신앙자의 길에서 잘 모시고 받드는 것이 부인의 책임이 아닌가 하고 저는 원하는 대로 그 뜻을 같이 결의하고, 이왕에 목회자 부인이 되었으면 한 남자를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 남자를 위해서 내가 내조를 잘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남편을 내조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하면서 남편을 내조하는 가운데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처음으로 부임한 임지 교회가 충청남도 금산이라고 하는 곳에 금산교역장으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때 당시의 교회가 남의 세를 사는 교회인데 너무 교회가 허술해 교회를 내가 하나 지어 드리겠다는 제 남편의 생각이 있어 가지고 협회에서 아무 보조금 없이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인삼 장사를 하기 시작했어요  인삼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인삼을 팔아 가지고 그 돈을 모으고 그것을 보는 많은 식구들이 또 같은 사업을 해서 그 사업으로 돈을 모으고 또 빛을 얻고 그렇게 해서 제일 처음으로 한국에서 A타입의 교회를 짓게 되었어요.

 

그 A타입의 교회를 짓고 헌당식을 하고 아버님께 보고를 하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A타입으로 교회를 지었는데 아주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하고 보고를 드렸더니 아버님께서 전국 목회자들이 다 모인 가운데 한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하시는 거예요. "몇 명이나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느냐? 돈은 얼마나 들었느냐?" 여러 가지로 물어보시고 대답하시고 그러시더니 "네가 혼자 협회의 지원 없이 교회를 지었으니까, 그것을 조건으로 해 가지고 대한민국 전국에 각 시에 교회를 다 지어 주시겠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전국에 그때 교회를 다 짓게 되었어요.

 

그래서 A타입 교회를 전국으로 다 짓고 이달에는 교회가  헌당식 또 이달에는 어느 교회가 헌당식  헌당식을 다 했는데 교회를 못 짓는 곳이 있었어요. 그곳이 천안교회였어요. 지금의 선문대가 자리 잡고 있는 천안교회가 교회를 다 지었는데 천안교회만 교회를 못 짓고 땅을 구입하지도 못하고 그런 때였어요.

 

그때 협회에서 "제일 교회를 먼저 지은 송영석 교역장이 천안교회에 다시 가서 마지막으로 교회를 지어야 되겠다" 인사이동을 다시 해 가지고 제가 천안교회로 갔습니다. 천안교회를 와서 보니까 조그마한 곳에서 예배를 보고 있었어요. 그때 한 4개월 동안 토지를 준비를 해 가지고 교회를 짓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교회를 지으면서 이젠 새롭게 마지막으로 A타입 교회가 지어지는 과정에 한참 교회를 지을 때 저는 그때 딸아이가 3살, 큰아들이 7살, 그 밑에 돌 지난 아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돌 지난 아이를 업고 교회를 지었는데 그 식구들과 같이 교회에서 자면서 아기를 미처 다 돌보지 못해 3살짜리 딸을 잃어버렸어요. 교회를 짓느라고 항상 거기에 신경을 쓰다 보니까 애기가 나가 노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얼마 있다 보니까 아기가 없어진 거예요. 우리 애기가 어디로 갔다고 애기를 찾아 헤맸어요 

 

애기가 없어진 거예요 애기를 대개 2, 3시간만 잃어버려도 정신이 없잖아요 애기를 잃어버리니까···. 어머니들을 아실 거예요, 애기가 없어진 그 마음을. 그런데 제 애기는 밤이 새도록 애기를 찾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통일교회는 돈이 많으니까 누가 애기를 데려다가 돈을 요구하려고 애기를 데려간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보고 또 어느 집 화장실이라던가, 한국에는 그때는 재래식 화장실이 아주 무섭고 깊어요. 화장실에 빠졌나 또 그런 생각도 하면서 애기가 없어지니까 그 밤을 어떻게 보냈나 모를 정도였어요

 

그래, 그 이틑날 오후가 돼서야 우리는 그 애기를 찾게 되었어요. 우리 아기가 놀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간 것이 집에서 4킬로나 떨어진 곳으로 나갔던 거예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애기가 해가 저물고 어둡고 그러니까 길가에 쓰러져 울고 있는 것을 본 어떤 할머니가 애기를 데려다가 밥을 먹이고 애기를 재우고 그렇게 해서 우리 딸한테 “애기야, 너 어디서 사니? 어디서 사니?" 그러니까 "고애, 고애"

 

교회에 살고 있으니 애기니까 교회라는 발음이 안 나오니까 “교애 교애” 이렇게 얘기하니까 이 할머니는 귀가 어두우니까  잘못 알고 고아원에서 나온 애기인 줄 알고 "고아원 고아원" 이렇게 들은 거예요. 그러니까 애기가 고아원에서 그냥 탈출해 나온 애기구나, 그렇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해서 애기가 없는 사람한테 제 딸을 주기로 약속하고···. 저희가 물어 물어 어떻게 찾아갔는데 그 애기 없는 아줌마가 데리고 가려고 손을 붙잡고 나오는 것을 그때 보게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딸을 붙잡고는 애기를 찾았다고 그렇게 해서 그 애기를 잡고 교회에 와서 얼마나 회개하면서 울었는지 몰라요. 그전까지는 목회를 해도 전도를 해야겠다. 또 여러 가지로 일을 해야겠다, 이런 마음만 있지 진정으로 제가 하늘 심정을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왜냐?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그 아담 해와를 찾기 위해서 6000년이나 하나님께서 수고해 오신 그 심정을 그때까지 제가 깨닫지 못했던 거예요. 애기를 잃어버린 다음에서야 그때 하나님이 아담 해외를 잃어버리고 나 같은 이런 심정으로 아담 해와를 찾으셨겠지.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아들딸들을 찾아서 하늘 앞에 복귀시켜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에 "하나님 아버지, 제가 더 열심히 전도하고 더 열심히 수고해서 하나님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다시 한번 각오를 하면서 "제가 하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 기쁘십니까? 또 제가 철야를 많이 하는 것이 기쁘시겠습니까? 금식을 많이 하는 것이 기쁘시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물어보고 있을 적에, 그때 당시에 우리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면 통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좀 반대를 안 하고, 우리 통일교회를 좋아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 아니겠나"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야, 내가 이왕 이렇게 생각했으면 앞으로 사회활동에 발을 들여놓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제가 사회활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부인회에 내가 들어갔어요. 통일교회 목사 부인이 어떻게 사회활동을 하겠다고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빈정거리면서 이미, 왕따 일본에서는 뭐라고 하나요? 이지메, 이지메를 시키는 거예요. 통일교회 목사 부인이 어떻게 여가 사회활동을 한다고 하느냐.

 

그때 우리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께 새로운 진로 안을 내걸고 대한민국이 잘 살 수 있는 운동을 한 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었어요 그때 시골에 초가집을 없애고, 기와집을 만들고, 길을 넓히고 그렇게 해서 새마을운동을 했었는데, 저도 그때 새마을운동에 참여했던 거예요.

 

그렇게 해서 처음에는 동네 부인회에 들어가서 "내가 부녀회를 위해 나도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할 일을 알려주십시오. 나는 통일교회 목사 부인이지만 나도 사회활동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통일교회 다니는 목사 부인이 어떻게 우리하고 같이하겠느냐"고. 그래서 "나도 똑같은 여자고 똑같은 대한민국의 사람이니까 나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들을 설득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서 그야말로 그분들이 원하는 대로 맨 밑의 종의 종의 입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차츰차츰 인식이 달라지게 되고 임원회의 간부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총무와 경리를 겸하면서 부인회비를 걷어서 무슨 활동을 하자는 제안에 "이렇게 해서는 잘 살기 운동이 안 될 텐데···.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있는 동네는 굉장히 어려운 동네였고 병에 결려도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이자가 비싸 빚을 얻을 수도 없고 쌀이 없어서 굶게 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가난 구제를 위해서 고민하던 차에 약한 여자의 마음이지만은행을 만들면 어떨까 ···.  많은 돈을 모아 가지고 적은 이자로 이웃을 도와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 집 한집 방문하면서 "우리 동네가 잘 못 사는데 한 번 잘 살아 봅시다" 하면서투자를 해 주면 어떻습니까?" 하면서 투자자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부인이 교회일이나 잘 이끌어 나가면 되지" 하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협조를 구하면서 활동을 하다 보니 협조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려운 사람에게 이자 없이 빌려 주고 아픈 사람에게도 병원을 갈 수 있게 하고, 쌀을 사다 주고 연탄을 사다 주면서 차츰 인식을 높여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로 입으로 입으로 선전이 되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 주어 드디어는 조그마한 사설은행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많은 돈을 투자해 주셨는데 양해를 구해 3개월 무이자로 투자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통일교 목사 부인이 아주 좋은 일을, 은행을 만들어 아주 잘하고 있다는 소문이 천안시에 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대한민국은 1년에 한 번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 발표가 있었는데, 시에서 당선되면 도청 소재지로 그리고 중앙(서울)으로 가는 대회가 있었습니다.

 

천안시에서는 제일 잘한다는 13명의 대표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1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인 대전시로 나가게 되고, 저는 그럴 때마다 단상에서 제일 먼저저는 통일교회 목사 부인입니다.” 하면 다시 한번 저를 쳐다보면서 굉장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주시를 받곤했지만 그러면서 인식 또한 달라짐을 느꼈습니다. 각 시 군에서 17명의 대표들이 나왔는데 또 일등을 했습니다.

 

중앙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각 도에서 제일 잘한다는 사람들이 모였기에 굉장했습니다. 회장님은 제일 뒤에서 “파이팅” 하며 식구들은 “아버지!" 하면서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또 저는 단상에서저는 통일교회 목사부인입니다. 우리 동네는 낙후된 마을로써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지만 잘살기 운동을 하기 위해 마을금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할 때는 적은 돈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돈을 갖게 되었으며 어려운 사람에게 어려움을 나눠 가지며 부녀회원들과 같이 유치장의 죄인에게 강의를 해 주고, 학교에 가서 학부모형에게 강의를 해 주고 각 시청의 어머니회에서도 강의를 하면서···"  통일교회 목사 부인 입장에서 많은 P.R를 하게 되어 나쁜 교회가 아니라는 굉장히 좋은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은행의 자금은 자산이 많이 있지만 이걸 더 키워서 대한민국의 최고의 은행을 만들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은행을 만드는 게 저의 소망이요, 꿈이요, 바람입니다” 했더니 많은 사람들로 격려와 박수를 받으면서 단상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중앙에서 천안교회로 "중앙으로 올라오십시오, 좋은 일이 있으니까.통일교 목사 부인님, 전국 새마을 지도자 성공사례 대회에서 최고 모범 새마을 지도자로 대통령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국 몇 천 명 앞에서 대통령께서 훈장을 걸어 주시고 사진을 찍고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대표로 결의문 낭독까지 하게 되어 전국에 T.V로 방영되다 보니 많은 PR이 되었습니다. 훈장을 받고 나니 전국에서 강의 섭외를 받고 전국을 다니면서 강의를 할 때마다 항상 통일교회 목사 부인임을 강조하면서 강의를 했습니다. 라디오에서도 교섭이 오고 인터뷰를 하고 새마을 책에도 원고가 실리면서 정말이지 천안에서 교회인식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예비군(민방위) 강의를 하는 강사이고 저는 새마을운동 전국 강의를 하니, "통일교회 목사 부부가 국회의원으로 나오려고 하는구나" 하는 새로운 시선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창 신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선배가정이 서울로 동원되는 이동이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도 그 모든 기반을 다 남겨놓고 은행의 일도 전부 후배들에게 남겨 주고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목회의 내조를 하면서 활동을 했습니다. 서울에서는 교회가 없는 조그마한 교회였습니다. 식구가 2명뿐이었습니다. 또 전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8개월 만에 21명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임지가 옮겨지면서 동작교역으로 승격된 동작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식구는 20명 안팎이었습니다. 세를 놓고 예배를 본 교회였어요. 천안에서도 큰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를 못 짓겠느냐 하면서 정성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생선 가게를 하는 사람들도 집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 집이 없으면 안 되지 않겠냐고···.  큰 집을지어 봉헌하겠습니다" 하면서 조건으로 흑석동 성지에서 정성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교회가 천만 원짜리 교회였을 때 일억천만 원을 주고 사서 봉헌해 드렸습니다. 말이 봉헌해 드린다고 하지만 짓기까지는 엄청난 빚을 얻고 또 갚고 얻고 하여 77번의 빚을 얻고 갚았던 것입니다. 빚을 얻은 것은 저의 책임이고 남편은 저를 뒤에서 조절하는 거예요. "저 집이 돈이 있을 것 같다고"하면 가서 돈을 빌리고 ···.  또 빌려 주는 거예요. 77명의 사람을 만나고 또 얼마 안 있어 다 갚아지는 게 하늘의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부에게는 징크스가 있어요. 교회를 짓고 마음을 놓고 살만하다 보면 인사이동이 있어요. 한 달을 살지 못해요. "참 좋다" 하면서 "방도 하나 가지고 아이들에게 방도 하나 주고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하면 또 인사이동이 되고 또 교회를 짓고 ···, 하던 것이 교회를 4채를 지었어요.

 

하늘 앞에 정성과 열정의 마음이 없으면 지을 수가 없어요. 그런 다음 본부교회 목사가 되어 2년 근무하다 보니 이제는 충남대전 본부의 교구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게 된 이유는 전 대전 교구장이 식구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던 중에 전복되어 8명이 죽었는데 그 교구 교구장으로 가게 된 거예요. 식구 4명, 비식구가 4명이었습니다. 8명의 무덤에 가서 위로 기도를 하고 ···.  특히 식구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비난이 심했습니다.

 

그 시절에 아버님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셨어요. 진지를 해 드리고 그 그릇이 마르기도 전에 또 오시곤하여 한 달에 네 번 오시며, 많은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셨던 겁니다.

 

아버님께서는 하루는대학을 지으려고 하니까 땅을 알아봐”라고 하시는 거예요. 남편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기에 아버님께서 명령하시자마자 "아버님!" 하면서 그 길로 땅을 찾아 아버님이 돌아가신 그날 오후 바로 한남동으로 뒤따라가 "땅을 찾았습니다. 천안에 좋은 땅이 있습니다.” 하면서 약도를 보여주시니 "땅을 보러 가자!" 그래서 준비도 안 한 채 새벽같이 부모님을 모시고 천안으로 가서 땅을 보시고는 ” 참 좋다. 땅을 70만 평을 사라

 

그리고 아직 계약도 안 한 상태인데 아버님께서는 기도하자하시면서 산너머 삼봉산으로 올라가셔서 땅을 다 사신 것처럼 기도를 하시는 거예요. 땅을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  "이렇게 좋은 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다가 대학을 지어서 봉헌해 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기도를 하셨어요.

 

그래서 그 땅을 사기 시작한 거죠. 그것이 바로 지금 천안 선문대학교예요. 사실 말이 그렇지 70만 평의 땅을 산다는 것이 주인이 몇 백 명이나 되는지 몰라요. 땅 주인이 그리고 산에 산소가 몇백 개나 되는지 몰라, 땅을 사려니까 그 산소 주인의 집집마다  한 분씩 한 분씩 찾아가서 계약을 다 해야 돼요. 그러니까 계약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고 돈을 많이 달라는 사람도 있고, 뭐 이건 통일교회에서 하는 거라니까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그 땅을 사기까지 아주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참 많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땅 주인을 찾아가서 경배를 하면서 제발 이 땅을 파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1:1로 상대를 하면서 그 땅을 사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70만 평을 다 못 사고 47만 평인가 사 가지고 그 땅에다 선문대학교를 아주 아름답고 좋은 학교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교구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 저기에 대학을 지으면 기숙사도 짓게 될 텐데 기숙사의 사감을 꼭 내가 해 봤으면. 기숙사생들을 지도해 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사감이 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막연하게 그런 꿈을 꾸고 있었어요.

 

교구장 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기숙사 사감을 할 생각을 했는지, 그런 입장이 아니었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대학교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내가 이 학교의 기숙사 사감을 꼭 해 봐 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항상 그 학교를 놓고 나를 이 학교에 사감이 되게 해 주세요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는 가운데 제 남편이 미국 UTS로 공부를 하러 가게 되고 미국으로 갔다가 또 남미로 가게 돼서  가족을 제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사감을 해야 되겠다하는 생각을 하고 나서 총장을 찾아가서 총장님께 이 기숙사 사감을 제가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여러 사람들이 이력서를 내야 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력서를 냈는데 제가 초대 사감으로 뽑히게 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제가 선문대학교 초대 기숙사 사감을 하면서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선문대학교로 왔을 때 일본 유학생들에게 많은 편의를 봐 주었어요. 기도실을  만들어 주고, 항상 참부모님 사진을 놓고 기도를 해 주고 시간만 있으면 학생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해 주고,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훌륭하게 되어 이 학교에 큰 영광을 드리는 그런 인물들이 되어 달라고 항상 일본에서 유학 온 학생들에게  부탁을 하면서 교육을 했어요.

 

그렇게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유학생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학생들도 물설은  한국 땅에서 반대하는 시부모님도 있었고 축복받고 시골집에 가서 어려운 가운데 있을 적에 저희 부부, 송 회장님과 저는 그 사람들의 시골집을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시부모님들께 이 사람들은 비록 친정은 일본이지만 이 사람의 친정어머니는 저이고  송 회장님은 친정아버지이시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시집왔다고 반대하지 말고 핍박하지 말고 시집살이시키지 말라그리고 남편한테도 "이 부인을 잘 사랑해라"

 

그렇게 지도를 하면서 다른 한국 식구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일본 식구들에게는 "너희들 친정아버지 어머니는 교구장 부부다. 남편이 속을 썩이거나 남편이 때리거나 남편이 술을 먹거나 하면 언제든지 교구장님께 전화를 해라

 

일본 식구들에게 완전 개방을 해 놓았습니다. 언제든지 전화를 할 수 있게 해서 어떨 때는  밤 12시에도 전화가 와서 교구장님, 우리 싸웠어요. 빨리 좀 와서 말려 주세요이렇게 전화가 와요. 그러면 또 한 밤 1시라도 한 시간을 걸려서 그 집에 가서 "왜 싸웠느냐?" 이유를 물어보고 어떻든 간에 부인이 잘못했어도 한국 남자를 먼저 나무라고 "왜 그랬냐?" 그렇게 하면서 부인 식구들을 위로해 주면서 안심시켜 주고 잘 살 수 있도록 지도했습니다.

 

그러고 일본에 와 보니까 참 여러 가지로  문화적인 혜택이 좋아서 화장실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 한국의 화장실은 옛날 재래식 화장실이라서 아주 불편해요.

 

일본 부인식구들한테무엇이 제일 애로점이 있느냐?물으니까 화장실이 제일 애로점이 있다고 그래요. 시골은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고 재래식이기 때문에  많이 불편을 느껴요. 그래서 그 부모한테 제일 먼저 고쳐 줄 것은 화장실을 고쳐 주라고,  일본에서는 이런 화장실이 없으니까 화장실부터 고쳐 주라고 해서 문화적인 생활환경을 바꿔 줘서 일본 식구들이 화장실을 편하게 사용하게 되었어요. 집은 안 좋아도 화장실은 깨끗하게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며느리들이 쓰기 좋게 배려를 해 준 한국의 시부모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많은 일본 식구 가정 가정을 순회하고, 그 가정을 위로하고 또 식구의  어려운 점을 풀어 주고 그랬던 것을 부모님께 보고를 드렸더니 아버님께서는 내가 할 일을 네가 했구나. 참 고맙다그러시면서 아버님이 기뻐하시면서 다른 교구장님들을 보고 "너희들도 다 그렇게 해서 일본 식구 집을 찾아가서 방문을 하고 위로를 해 주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게 된 것은 제가 한 것 보다도 저희 친정어머니의 그 정성이 계셨기에  오늘날 이렇게 저희가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저는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요. 저희 아빠보고 "송영석, 네가 출세한 건 뭐 네가 잘나서 출세한 줄 아냐. 네가 출세한 건 다 네 장모님 덕인 줄 알아. 네 장모님 때문에, 네 장모 정성으로 네가 출세한 거야” 그렇게 항상 말씀을 하시면서 저희 어머니를 기억하고 계셔요.

 

저희 어머니가 승화하셨을 때는 아버님께서 송영석 장모가 승화했는데 모두들 가서 보라고. 정성 들인 식구가 승화했을 때는 가서 봐야 정성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아버님께서 한남동에서 말씀을 하셔 가지고  많은 협회 간부들이 오셔서 저희 어머니의 승화식에 참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금년도의 4월 5일 식목일날  저희 친정아버지가 승화를 하셨는데 참 그때도 국진님이 친히 오시고, 현진님이 화환을 보내 주시고, 많은 참자녀님  가정들께서 화환을 많이 보내 주시고, 아버님께서 "축복받은 가정은 이렇다"고 하늘이 인정하시고 또 아버님께서는 다음에는 천국에 갈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면서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한남동에 갈 때면 훈장 탄 얘기해 봐라” 항상 그 훈장 탄 것에 대해 아버님은 자랑하고 싶으셔 가지고 미국에 가면 미국에 가서도 훈장 탄 얘기를 해 봐라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또 어디를 가게 되면 또 너, 나와서 훈장탄 얘기를 해 봐라”.

 

아버님은 몇 번 듣고 듣고 들으시고 들으셔도 맨날 그 이야기를 간증하라고 말씀하시고 틈만 있으면 일본 식구들 120명 선교사들이 모였을 때도 ···, 어제도 훈장 탄 이야기를 하라고 내일도 또 훈장 탄 이야기를 해라 하시면서 항상 훈장 탄 이야기를 하라 하시고, 일본 식구들을 천정궁에 불러 놓고 아버님께서는 또 훈장 탄 사람  어디 갔어  나와서 훈장 탄 이야기를 하라고 하시며 아버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것은 저희 부모님이 정성을 많이 들이시고 부모님이 총생축헌납을 해 드렸기 때문에 그 축복이 저희들한테 돌아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희 할머니가 독신축복을 받으셨어요. 그리고 부모님이 기성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 저희 4대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4대 이상 축복받은 가정은 한국에서 얼마 되지 않는데  4대 이상 축복을 받았다고 해서 상을 내려 주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시댁인 송 회장 가정의 부모님이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제가 시댁으로 뛰어 들어가서 시아버지를 전도하고  시동생을 전도해서 축복을 받쳤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정이 모두 축복을 받아서 일본 식구가 세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저희 남동생 부인은 나고야 오카자키 출신입니다. 그리고 송 회장님의 남동생 부인도 일본 사람이고 또 1800가정 송 회장님 여동생 딸이 일본으로 시집을 왔어요. 그래서 저희 집에도 일본과 국제축복 결혼자가 세 명이 있어서 여러분을 볼 적마다  더 친근감이 있고 여러분을 볼 적마다 "나도 참 일본으로 국제결혼을 한 한 가족이 되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니면서 보니 여러분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그래도 항상 부모님께서 상 탄 이야기를 해라 하시면서  일본에 순회 가서 간증을 했다고 하면 잘했다고 하시면서  상 탄 이야기도 했느냐고 하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할머니, 어머니가 승화하셨는데 저희 할머니는 모든 재산을 통 털어서 총생축헌납한 그 조건이 있었으니 저희 할머니께서 영계에서 지금 경리부장으로 활동하고 계신대요. 할머니가 하루는 내가 저기 하늘나라에서  돈 나눠 주고 있는 사람으로 있다”고 하시면서 돈을 쥐고 이것은 공금이고 이것은 내 개인 돈인데 너에게 준다” 그러면서 제가 항상 돈이 없을 만하면  저희 할머니가 꿈에 보여요. 할머니가 꿈에 보이기만 하면 그 뒷 날은 크게 돈이 생겨요.

 

할머니가  승화하신 다음부터는 돈이 없고, 필요할 때는 할머니, 돈 좀 저 주세요" 그리고  잠을 자면 그 이튿날은 또 돈이 생겨 가지고 필요한 만큼 쓰는 기적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살면서 필사적인 기도를 하고 필사의 정신으로 뜻 앞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그다음에는 모든 축복이  손자 때가 아니더라도 당대의 때에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아시고 이 시간에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면 저를 본 삼아서 저보다도 더 훌륭한 여러분들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