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구보키 오사미 久保木修己

true2020 2022. 10. 19. 17:17

 

◆ 구보키 선생님 간증 중에

* 일본의 모세라 불렸다.

* 1931년 2월 3일~1998년 12월 13일 만주국 안동현 (현 요녕성 단동시)에서 출생. 

 

* 지바현 출신의 은행원 아버지 仙蔵와 어머니 よしの長男의 장남. 

 

* 1945년 일본 지바현으로 돌아왔다. 

* 慶應義塾中等部 때 야구부 소속. 甲子園에도 出場. 

* 대학생 때 집 가까운 立正佼成会에 어머니의 권유로 입교. 庭野 日敬 회장의 비서. 

 

▶ 立正佼成会

- 霊友会から派生。日蓮系、法華系 仏教。

- 庭野鹿蔵 개명 후 庭野 日敬 にわの にっきょう. 1906年11月15日~1999年10月4日1938年3月5日에 設立。

- 2023年信者数約220만여 명。

- 本部は杉並区。

- 2代目 庭野浩一、가명 庭野 日鑛 にわの にちこ. 1938年3月20日~ 출생. 

 

* 1962년 31세 통일교회에 입교. 

- 立正佼成会 당시 庭野日敬会長의 指示로 統一教会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던 청년부 50名 정도가 통일교회에 같이 오게 되었다. 

 

* 1964년 일본 통일교회 초대 회장.

 

* 1968년 2월 22일 통일교회 430가정 합동결혼식에 기성가정으로 참가. 

* 1968년 국제승공연합 초대회장

* 1970년 9월 2일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회견. 

* 1970년 9월 20일 일본 무도관에서 WACL 세계반공연맹 세계대회 개최. 대회 집행위원장 및 의장. 

* 1971년 5월 14일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과 회담. 로마교회 바울 6세와 회담. 

* 1973년 전국 124곳 구국의 예언 제목으로 강연. 

* 1973년 11월 23일 문선명 한학자 총재 부부와 이상헌 김영휘 선생 등과 같이 통일교회 본부에서 전 수상 기시 노부스케와 회담. 

* 1998년 5월 뇌경색으로 쓰러지다. 

* 1998년 12월 13일 오전 1시 59분 영계로 떠나다. 

 

* 출판물

1986년 5월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 광언사. 

1989년 "문선명 선생과 댄버리 진실 - 재판 문제의 배경을 살피다" 광언사. 

1990년 1월 "문선명 선생과 신 소련 혁명" 광언사. 

1996년 2월 "애천 애국 애인 - 모성 국가 일본의 행방" 회고록. 

2004년 7주기 "아름다운 나라 일본의 사명" 출판. 세계일보사.   

 

▶ 구보키 오사미 님의 간증 중에

 

마음이 상냥한, 부족하지만 종교가가 내 본래의 모습이다. 내가 왜 위대한 사랑의 가르침, 문선명 선생님에 말씀에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가 전하겠다. 

 

금후 문제가 될 광대한 중국 대륙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내 조국 일본에 돌아왔다. 종전으로 내외 동포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저의 부모는 왜인지 식사 때나 언제나 "너의 조국 일본,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산하도 아름답고 거기에 사는 일본 사람들의 마음도 아름답다. 도둑 같은 건 없다."

 

아이인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자물쇠를 해도 도둑 같은 건 들지 않는다.  중국 대륙은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란 언제나 일반적으로 있는 것이었다. 

 

자기 조국 일본에 대해 동경을 갖고 있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죽기 전에 가 보고 싶다. 만주 중국 대륙에 있어 일본엔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강렬한 생각은 13살 때 필연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화물선에 돌아왔다. 며칠간 거친 현해탄을 건네 이윽고 야마구치현의 센자키라는 작은 항구 도시에 도착했다. 

 

선원들이 "야, 저곳이 일본이다"   내가 일본에서 본 일본!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가. 여름밀감이 언덕 위에 열려 있었다. 사토 하루오는 "5월의 노래"의 일절을 기억했다. 갑판 위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곳이 조국 일본인가. 

 

부모의 고향, 지바현으로 갔다. 도네 강변의 아름다운 곳이었다. 부모에게 언제나 들었던 일본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 서로 돕는 민족, 생활은 어렵지만 힘을 합쳐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肩を寄せ合う 그런 나라란다. 그런데 내가 돌아와 본 일본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다운 민족이 아니었다. 종전 후 혼란기에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부모에게서 들은 이미지가 깨지고 절망에 떨어졌다. 집 앞을 흐르는 도네강에 몸을 던져 죽어 버리고 싶었다. 이런 나라에서 살아 뭘 하겠는가. 이렇게도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점점 마음은 거칠어지기만 荒む(すさむ) 했다.

 

시간이 흘러 은행원인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동경에 상경했다. 소년 불량배로 살고 있었다. 난 희망이 없다. 어머니는 아파하며 걱정하고 있었다. 내 마음을 부모가 알 턱이 있을까. 부모에게 반항만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 가까운 곳의 종교단체인 立正佼成会에 발을 들였다. 그곳에서 부모에게 효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을 이곳에 데려오면 좋아지리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나를 그곳에 인도하려 했다. 난 결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날 설득하려는 어머니에게 "시끄럽다"며 먹고 있던 밥그릇을 어머니에게 던졌다. 그래도 어머니는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날 인도하려 하고 있었다.

 

수개월 후 어머니의 정열에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가 보자고 立正佼成会의 문을 두들겼다. 당시는 작은 종교단체였다. 그런데 그곳에 겨울인데 몇 명의 청년들이 맨발로 정면의 돌계단을 닦고 있었다.  거의가 폐병을 앓고 있는 청년들이었다. 병마와 싸우며 봉사 정신, 난 몸은 건강하다. 아픈 곳은 없다. 그런데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들을 보고 뭔가 죄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마음이 안정되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들었던 아름당운 일본을 빨리 만들기 위해서는 뭐가 가장 좋은가 쭉 고민하고 있었다. 정치가가 될 까. 그러나 정치의 세계는 너무 더럽다. 정치로 이 나라가 좋아질 리는 없다. 뭘 해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종교라는 이제까지 몰랐던 미지의 세계에서 젊은이들, 또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혼을 불태우고 있는 모습에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힘이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다.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5시 학교에 가기 전에 立正佼成会의 정문까지 달려가서 "날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이것이 1년 365일 내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언제나 반대편에서 개를 데리고 걸어오는 아저씨가 있었다. 이윽고 얼굴을 서로 익히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느 날 이 사람에게 이 물건을 전하라는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그 집에 가서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언제나 아침에 인사를 하던 그 아저씨였다. 立正佼成会의 회장이었다.

 

"너, 그 아이가 아닌가?" 

'"예, 종교로 이 일본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기뻐 매일 인사를 하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해서 니와노 회장과 인연이 맺어졌다.

 

* 살아 있는 신, 묘코와의 만남.

 

금세 전국 立正佼成会에 소문이 났다. "이상한 청년이 들어왔는데 회장과 깊은 인연이 있고 살아 있는 신, 묘코와 만나 점심을 먹고 용돈까지 받았다."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다며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개인의 구원 중심한 가르침은 귀하다. 하지만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자기 구원만으로 일본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13살 때의 문제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立正佼成会에선 나라나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선조의 인연 또는 부자의 인연 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도 있을 것이다. 세계가 있어 일본이고 일본이 있어 내가 아닌가. 개체와 전체의 2중 목적, 이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뜻을 가진 한 청년이 있었다. 그와 같이 이런 문제를 두고 밤새 토론을 종종 하곤 했다. 그와는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없어졌다. 부모도, 주위 사람들도, 나도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디로 왜 간 걸까.

 

7개월째 후쯤 신주쿠 역에 일이 있어 나갔다.  시골의 작은 역과 같았다. 어떤 청년이 외치고 있었다. 새끼줄로 노보리를 자기 몸이 묶고 있었다. 그 천에는 "통일원리에 의한 통일 세계 실현"이라 적혀 있었다. 여름의 더운 날이었다. 아- 더위를 먹고 미쳤다 보다. 

 

뭔가 외치고 있어 가까이 가 보니 7개월 전에 갑자기 사리진 그 청년이었다. 모른 척하고 기둥에 숨어 지켜보았다. 2, 3일 후에 손님이 왔다고 했다. 그 당시 난 立正佼成会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어 있었다. 그 청년이었다. "구보키 선생, 난 놀라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입버릇은 "すばらしい". 멋진 말씀을 들었다. 먼저 들어 보라 권유하기 위해 왔다. 그날 돌려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매일 왔다. 꼭 점심때 온다. 3인분 정도 먹었다. 작은 흑판을 가지고 왔었다.

"그럼 그 멋진 말씀이란 것을 얘기해 봐라."

 

플러스 마이너스 ···. 이해가 안 되었다.

 

"돌아가라." 

 

어느 일요일이었다. 오늘 집회가 있으니 와 달라. 멋진 곳이 있으니 가 보자. 立正佼成会, 스기나미구의 동양 제일의 대전당이다.  그 당시 50억 엔의 건물이었다. 페르시아의 카펫, 이탈리아의 대리석, 프랑스의 상데리아 등등. 그곳에 와서  "すばらしい" 한 곳에 데리고 간다고 한다. 이 이상 더 멋진 곳이 어디인가? 자, 그럼 그 멋진 곳에 데려가 달라.

 

후미진 스기나미구의 기울어진 2층 집이었다.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오라. 4조와 3조 반의 방 두 개였다. 6명 정도의 청년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곳이 그 멋진 곳이냐?" 물었다. "그렇다" 설교자 니시카와 선생은 몇 만 명의 군중에게 외치듯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부엌에서 뭔가 가지고 왔다. 방울토마토와 잘게 자른 양배추였다. 그것이 반찬이었다. 그리고 밥을 보고 놀랐다. 보리밥이었다. 종전 직후라면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지만 쇼와 34년 35년, 일본의 경제 부흥기. 물건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일본 한 구석에 이런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보리밥이었기에 젓가락으로 먹을 수 있을까. 

 

그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먹으면서 "세계를 구하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진실된 얼굴로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 "난 졌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100만의 청년부원의 책임자로서 지도하고 있었다. 누구 한 청년이 이런 청년이 없다. 모두 자기  것만에 만족하고 있다. 통일교회의 청년은 세계를 염려하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이곳에 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최고 간부였다. 아버지는 경제 책임자의 이사였다. 친척들을  많이 전도했다. 나를 참의원 후보로 내세우려고 했다. 300만 회원이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당선할 수 있는 회원이었다. 저 청년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의 처해진 환경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은 불가사의한 일을 하신다. 니시카와 선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회장의 비서이기 때문에 나와 회장을 만나게 해 달라. 회장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있다." 

 

회장에게 말하니 "아, 좋다. 만나자"

 

나도 그곳에 같이 있었다. "니와노 선생, 나에게 당신의 立正佼成会에서 당신이 고른, 유망한 청년 4명을 나에게 맡겨 달라. 내가 40일 후에 훌륭한 청년으로 해 드리겠다" 

 

한편은 기독교, 한편은 불교. 니와노 선생은 참 마음이 넓은 분이다. "그것은 좋은 생각이네. 합시다. 내가 고를 테니 교육해 주세요" 

 

니와노 회장은 나에게 상담을 해 왔다. "좀 전 니시카와 선생의 말이 재미있지 않은가. 상담인데 나에겐 아들이 있다. 대학을 나와서 빈둥빈둥 놀고 있다. 내 얘기도 안 듣는다. 난 종교가로서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4명 가운데 내 아들도 넣어라. 아들이 걱정이 되기 때문에 구보키 군이 후견인으로 가 달라." 

 

하나님은 정말 기발한 섭리를 하신다. 제1회의 수련회에 참가했다. 천리교 등 여러 종교단체를 돌아다니며 우수한 청년들 4명 내지 5명을 모아 40여 명 정도의 일본 전국의 종교 단체의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  

 

2회 3회 원리 강의를 되풀이하면서 의문이 다 풀렸다. 놀랐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다. 전국에서 모인 청년 모두가 마지막엔 오열하며 회개를 하고 결의를 하고 있었다. 현대에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있는가. 혼란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기적이 어디 있을 것인가. 난 이 길을 가겠다고 결의했다. 

 

훈련의 일환으로 가두에서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 연설을 하게 되었다. 니와노 회장의 아들도 원리를 듣고 가장 많이 회개하고 울고 있었다. "종교의 귀함을 이제야 알았다."

 

그도 신주규 역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니와노 회장은 조용히 신주쿠역에 오셔서 가까이 가지는 않았지만 후지 은행 옆에서 아들의 가두연설을 듣고 있었다. 회장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고맙다" "고마운 일이다" 

 

원리 말씀을 배울 때 매일 이런 것을 배웠다고 보고를 올렸다. 거의 저녁식사 때의 일이다. 회장은 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식사하셨지만 때때로 젓가락을 식탁이 치듯이 놓으시며 "이런 말을 도대체 누가 하는가!. 이것은 엄청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라고 종종 말하며 팔짱을 끼고 가만히 계셨다. 나도 그 모습을 보고 존경하는 회장이 이 정도로 감동하기에 "이건 역시 대단한 거구나." 

 

난 이렇게 말했다. "니와노 회장님, 우리 4명만 듣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일본 전국의 立正佼成会의 청년들이 들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몇 번 수련회를 합시다" "그렇다. 네가 전국에 지령을 내려 전국에서 청년을 모아라" 이렇게 해서 통일교회의 수련회에 수 십 명의 청년들이 오게 되었다. 

 

수련회가 끝나고 각 지구로 돌아가 보고회를 한다. 너무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보고한다. 처음엔 감동했지만 이대로 立正佼成会는 괜찮은가. 간부들이 반대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구원만을 고집하는 것에 지쳐 있었다. 전국에서 통일교회로 몰려왔다. 나는 立正佼成会로 다시 돌아가라고 했지만 다시 온다.

 

 

* 3년간의 폐품 회수 정성을 들였다. 그런 가운데 6년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수련회를 주관해야 했다. 아내가 많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소문이 소문 불러일으켰다. 친척 회의가 종종 열리게 되었다.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라"

 

나에게는 2아들과 배 속에 아이가 있었다. 장남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식이었다. 잠을 못 자고 있었다. "괴롭다. 괴롭다"  임신한 아이는 배 속에 거꾸로 서 있었다. 임부가 죽을지 아이가 죽을지 모를 일이다. 제왕절개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았다. 6년 만에 나았다. 집에 갔다 나올 때 막내가 "아저씨,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통일교회 회장으로 立正佼成会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 니와노 회장이 "구보키 군, 이것으로 수련회를 그만두자." 원리를 반밖에 전하지 못했다. 복귀 원리가 남아 있다. "나에게는 300만 회원이 나에게는 있다. 이 이상 들을 수 없다"  

 

석존(석가모니를 높여 이르는 말)

 

니와노 회장과 헤어졌다. 문선명 선생, 세계를 구원해야 하는 문선명 선생은 인류의 고뇌를 하나하나 승리하지 않으면 구원할 수 없다며 승리했다. 여러분이 메시아가 돼라. 참사랑의 사람이 돼라. 그것이 메시아가 되는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