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강론

복귀섭리시대 -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true2020 2022. 12. 19. 19:47

▣ 복귀섭리시대

-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 교구장제 기독교회시대 400년

- 기독왕국시대 120년

- 동서왕조분립시대 400년

- 교황 포로 및 귀환시대 210년

- 메시아 재강림 준비시대  400년

 

1. 로마 왕국

- 왕정 기원전 753~기원전 509년

 

2. 로마 공화국

- 공화정(로마 원로원) 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카이사르 Gaius(개인의 이름) Julius(씨족 명) Caesar(가문 명)

- 기원전 100년 7월 12일~기원전 44년 3월 15일

- 영어로는 시저라고, 독일에서는 카이저, 러시아에서는 차르 읽는다. 황제를 뜻한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Marcus JuniusBrutus, Quintus Servilius Caepio Brutus기원전 85년~기원전 42년 10월 23일, 에 공회정의 복고을 위해 암살.

-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불안이 귀족 전체에 번지면서 카이사르의 독주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돌아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도가 되어 카이사르의 암살 계획이 세워졌다.

 

▶ 제1차 삼두정치 기원전 60년. 

1) 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7월 12일~기원전 44년 3월 15일

재임 기원전 49년 10월~기원전 44년 3월 15일. 

2) Gnaeus Pompeius Magnus 기원전 106년 9월 29일~기원전 48년 9월 28일

3) 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경~기원전 53년

 

▶ 카이사르 내전 - 민중파의 카이사르와 원로원파의 폼페이우스 내전.

* 기원전 49년 1월 1일 원로원은 "원로원의 최종 권고" 발동하고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을 공화정의 적으로 규정. 

*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 1월 12일 13군단 10개 대대 45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루비콘 강을 건너다.   

 

* 로마 제국 당시 파견된 장군 및 군사들이 전쟁, 훈련 등으로 파견 나간 뒤 돌아오는 길에 루비콘 강을 건너야 할 경우 로마에 충성한다는 서약의 뜻으로 항상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있는 일종의 전통과 법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을 하고 이 루비콘 강을 건넌 다는 것은 곧 로마에 대한 반역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 전통을 먼저 깬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 "주사위는 던져졌다" 

 

* 폼페이우스의 근거지  Hispania (이베리아 반도) 원정

* 아프리카 원정

* 그리스 원정

* 폼페이우스 기원전 48년 9월 28일 이집트에서 살해당했다. 

*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 원정. 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년~기원전 30년 8월 10일.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 사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프콜레마이오스 14세를 공동 이집트 통치자로 선언. 

* 제2차 히스파니아 원정

 

▶ 제2차 삼두정치 기원전 43년

-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내 인척 관계를 맺은 다음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 2차 삼두정치에서 각자 맡은 지역도 옥타비아누스를 유리하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와 서방을 맡았고 안토니우스는 경제적으로 풍부했던 이집트와 동방을 맡았다.

 

1)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기원전 63년 9월 23일~14년 8월 19일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 이름은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2)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기원전 83년 1월 14일~기원전 30년 8월 1일 

3) Marcus Aemilius Lepidus

 

- 이집트에서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져버린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까지 버렸고 아르메니아 지역을 정복하자 이를 로마에 귀속시키지 않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왕 자리에 앉혔다.

- Marcus Vopsanius Agurippa B.C.62~B.C.12 B.C.21년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 

-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그리스의 악티움 곶 이오니아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3.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476년

 

▶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 기원전 63년 9월 23일~14년 8월 19일

- 기원전 27년 Augustus 는 "존엄한 자"라는 칭호. 

- 옥타비우스는 외할머니(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 자라났다.

- 카이사르는 자신의 외할머니의 남동생으로 유언에 따라 양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 기원전  42년 11월 16일~37년 3월 16일

- 재위 기간 14.9.18~37.3.16 

 

▶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Caligula, Gaius J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 12.8.31~41.1.24

- 재위 기간 37.3.16~41.1.24

-  근위대장 Cassius Chaerea 카시우스 카이레아에게 아내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 로마 제국의 4대 황제 Claudius

- 기원전 10년 8월 1일~54년 10월 13일 

- 재위 기간 41.1.24~54.10.13

- Tiberius의 조카.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 

 

▶ 로마 제국의 5대 황제 네로

- 37년 12월 15일~68년 6월 9일. 

-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 Caligula, Gaius J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마의 3대 황제. 12.8.31~41.1.24)

- 64년 기름 창고에 불. 로마 대화재. 기독교도 대학살.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  

 

 

◑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e   

- "창을 가진 자"란 뜻.

- 본명은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역죄를 씌워 사형을 언도한(막 15:15; 눅 23:23; 행 3:13; 13:28)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A.D. 26-36년경, 눅 3:1).

- 티베리우스 황제  때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의 후임으로 파견되어 유대, 사마리아(망대라는 뜻. 예루살렘 북방 50km. 북이스라엘의 6대 왕 오무리. 기원전 885년~874.부터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이스라엘의 수도.), 이두매(Idumea 에돔. 붉은이란 뜻. 에서의 별명.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를 다스렸으며, 수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지휘 아래 있었다.

 

- 당시 유대 총독은 유대인들의 사형 집행권과 지방 법원(함께 둘러앉는다는 뜻의 Sanhedrin공회 등.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관. 모세가 임명한 70인 장로회와 의장 1명, 민 11:16,에 그 기원을 둔다. 만장일치로 의결. 안식일과 절기, 야간을 제외하고 매일 소집.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다음날 다시 한번 심의 후 판결.)의 결정을 변경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대제사장의 임면권을 가지는 등 군사, 사법, 종교를 두루 관장하는 절대권력 행사하고 있었다.

 

※ 참고 

산헤드린 공회의 규칙을 감안해 볼 때 에수 그리스도의 재판은 ① 안식일 예비일(금요일)에 소집되었고② 한밤중에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③ 재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시 공회법에도 어긋나는 불법 중의 불법 재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예수님 당시, 빌라도의 로마 군영은 가이사라에 본부를 두고 있었고 민란 등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성전 내 안토니아 오새에 분견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주로 본부 가이사랴에 머물렀고 유월절 등 특별한 시기에만 예루살렘에 주둔하면서 군 병력을 강화하였다.

빌라도는 총독으로서 유대인들에 의해 제소된 예수 그리스도 재판하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고(요 18:38), 따라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나름대로 노력했었다(요 19:12; 행 3:13). 하지만 대제사장들의 사주를 받은 유대인들의 강압적인 요구 앞에(행 13:28) 자신의 임기 중 민란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하여 결국 유대인들의 요구를 좇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형 언도를 내리게 된다(마 27:24-25; 행 4:27). 그 자리에서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과는 무관하다면서 무죄의 표로 물로 손을 씻었다(마 27:24).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면서 빌라도의 허물을 분명히 적시하여 오는 세대에게 전하고하고 있다.

- 결국 그는 로마로 소환되었는데 유세비우스(Eusebius)는 그가 소환 도중 자살했다 하고 위경(僞經)에는 빌라도의 시신이 프랑스로 옮겨져 비엔나 인근에 매장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 되는 내용도 전해지는데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그가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애급의 콥트교회와 에티오피아 교회에서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 "프로쿨라’(Procula)를 성인(聖人)으로 추앙하기도 한다.

◑ Herod the Great

- 영웅의 아들이란 뜻

- 이두메 출신으로 팔레스타인과 그 인접 지역을 B.C. 47년~A.D 70까지 통치. 

- Herod Antipater1, Herod Antipater2세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기원전 47년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하였다. 

- 유대교로 개종

- 그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둘째 헤롯(헤롯 대왕 Herod the Great)에게는 갈릴리 총독을 맡겼다. 

- 기원전 40년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 

-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살육. 마 2:1~18.

- 기원전 4년 70세로 죽자 그의 왕국은 세 아들 아켈라오 Herod Acrchelaus(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 B.C.4~A.D6년), 헤롯 안디바 Herod Antipas(갈리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B.C.4~A.D39, 마 14:1; 막 6:14; 눅 3:19. ), 빌립Herod Philip2 A.D.4~A.D34에게 분할 통치되었다.  

 

◑ 헤롯 안디바 Herod Antipas

- 갈리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B.C.4~A.D39, 마 14:1; 막 6:14; 눅 3:19. 

-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후 이복형제인 빌립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 Herodias (영웅의 딸이라는 의미.)와 결혼했고 이를 비난하는 세례 요한을 살해했다. 마 14:3-12; 막 6:14-29; 눅 3:19-20

 

 빌립 헤롯 1세(Philip Herod Ⅰ, B.C. 4 - A.D. 34년)

- 헤롯 대왕 대제사장 시몬의 딸 마리암네 2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카 헤로디아(헤롯 대왕과 마리암네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스토블루스의 딸)와 결혼하여 살로메를 낳았다. 후에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데리고 빌립의 이복형제 헤롯 안디바와 결혼하였는데, 이런 부도덕한 혼인에 대해 세례 요한은 심하게 비난하였다(마 14:3; 막 6:17).

  빌립 헤롯 2세(Philip Herod Ⅱ, A.D. 34년 사망)

- 헤롯 대왕과 다섯 번째 부인인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나 줄곧 로마에서 자랐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으며 헤롯 대왕 사후 베다니, 이두레,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이 되었다(눅 3:1).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를, 인정이 많고 의로우며 37년 간 태평성대를 이루는 등 헤롯 대왕의 아들 중 가장 유능한 통치자로 소개한다. 후사 없이 죽어 조카 아그립파 1세가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Herod Agrippa 1 

- 헤롯 대왕의 손자,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

- 헤롯 안디바가 해임된 후 갈릴리 분봉왕으로, 후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을 다스리는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A.D.41~44년. 

-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회와 대적하던 중 사도 야고보를 죽게 하였다(행 12:1-23).

 

 Herod Agurippa 2

- 아그립바 1세의 아들. 부친이 사망할 때 겨우 17세의 나이였기에 부친이 다스리던 팔레스타인은 로마 총독의 직할이 되었고, 후에 칼키스 지역을 다스리다가 뒤이어 갈릴리의 동부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다(A.D. 53-70년경).

- 그는 누이 버니게와 근친상간하여 유대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 그는 가이사랴의 베스도 총독에게 문안 갔을 때 사도 바울을 대면한 적이 있고, 그때 바울의 변론을 청취하게 된다(행 25:13-26:29). 그는 바울의 무죄를 간파했으나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석방시킬 수 없었다(행 26:30-32).

- 그는 헤롯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로서 A.D. 70년 예루살렘이 패망하자 로마로 가서 로마의 행정관이 되었고 A.D.100년경에 사망했다.

 

◑ Nazareth 나사렛

- 초소, 망루라는 뜻. 

- 갈리리 호수 남서쪽 24km 지점. 올리브와 삼나무 등 식물이 번성함. 해발 430미터의 고원지대. 

- 이곳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마리아가 예수를 수태할 것이라는 고지를 받았다. 눅 1:26~33

- 마리아와 요셉이 헤롯 대왕의 대학살을 피해 애급으로 피난하기까지 이곳에서 살았고 눅 2:29, 51, 애급에서 돌아온 후에도나사렛에서 공생애를 출발하기 전까지 살았다. 막 1:9, 눅 2:39. 

- 공생에 기간 중에도 이곳을 몇 번 방문하셨으나 배척받았다. 눅 4:16,29. 

 

4.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 395년~1453년

 

◑ 제52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  274.2.27~337.5.22

- 재위 306~337년. 

-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1세는 서로마제국의 황제였고 어머니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와 헤어지고 막시미아누스의 딸 테오도라와 재혼하였고 이복동생 2명이 있었다. 

- 원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태양신을 숭배하였으나 로마의 다신교 전통에 따라 313년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勅令) Edict of Milan을 공포, 기독교를 인정하였다. 

 

* 밀라노 칙령

"그러므로, 우리도 자유를 가지고, 안전을 가지며, 우리의 공화국의 안녕을 위해, 우리의 연방이 모든 부분에서 손상되지 않고, 그들이 그들의 집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그들의 신에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위협이나 사기 등을 통해 지불이나 대가 없이 몰수한 기독교인들의 재산은 모두 돌려줄 것이요···."

 

- 313년부터 로마제국 동부를 차지한 황제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270~325)와 동맹을 맺고. 여동생을 그에게 정략결혼시켰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서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동로마의 리키니우스 지배체제가 확립되었다. 후에 리키니우스를 격파하였고 제국을 통일하여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서부와 동부를 통일한 다음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정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하였다(330).

 

* 325년 제1차 니케아에서 종교회의  First Council of Nicaea를 개최하는 등 교회 내의 부활절, 삼위일체 등 분쟁 ·교리(敎理) 논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 

- 부활절 서방은 주일, 동방은 부활절을 기준. -> 춘분 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제정.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 

 

* 정치 개혁

- 십자가형을  금지하고 교수형으로 대신. 

-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법령 반포. 성직자의 사유재산 소유 승인. 

 

◑ 테오도시우스 1세  Flavius Theodosius

- 347.1.11~395.1.17

- 재위 379.1.19~395.1.17

-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 Sanctus Ambrosius 340~397.4.4와의 갈등

390년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로마군 수비대장 한 명이 주민과의 다툼으로 집단폭행당한 후 사명. 당시 밀라노에 있던 테오도시우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철저히 보복할 것을 명령했다. 암브로시우스가 선처를 요구했지만 그대로 명령을 밀어붙임으로써 약 7,000명의 테살로니카 주민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 기독교 국교

- 391년 로마와 이집트에서 일체의 비기독교 의식을 금지.

-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전한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모든 형태의 이교 숭배를 제국의 전역에서 불법으로 규정.

 

* 동서 로마 통치의 마지막 황제.

- 그가 죽은 후 동서 로마로 완전 분리되어 다시는 통일되지 않았다. 

- 그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 Flavius Arcadius 377/378~408.5.1(동방 황제. 17살에 재위. 기간  395~408년)와 호노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