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민주 세계

중소 이념 분쟁. 1960년 2월~

true2020 2020. 12. 3. 11:33

1968.11.24(일) 전본부교회. 하늘나라의 宗孫(宗家의 대를 이을 맏손자.)이 되자.

021-236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삼천리 반도에서 공산당을 전부 몰아내는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중공을 몰아내야 됩니다. 더 나아가 공산당의 머리인 소련까지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배후 세력을 만드는 것이 통일교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이념으로 우선 남북을 통일하고 그다음에 중공을 통일하고 소련을 통일해야 합니다. 공산당을 3차에 걸쳐서 통일해야 합니다.

 

이제 소련과 중공이 근본적으로 이념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하기가 쉬워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요즘에 어떻게 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느냐 하는 것을 놓고 작전을 세우고 있습니다.  

 

 

▶ 中蘇 紛爭 또는 중소 대립.

-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공산주의 이념의 원칙적인 여러 문제에 관해 벌인 분쟁을 말한다.  

 

 

* 논쟁의 발단

: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위기 상황 때 소련은 겉으로는 중국 공산당 측을 옹호하였으나 실질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 중공과 인도 사이의 국경 분쟁 때 소련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 1956년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후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임기 1953.9.14.~1964.10.14. 전임자는 스탈린. 후임자는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평화 공존론(사회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 사이에서 무력에 호소하지 않고 평화적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196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기구 Warsaw Pact (1955.5.14.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동구권 8개 국가가 후르시초프의 제안을 통해 결성한 군사 동맹 조약.) 회의에서 평화 공존론 재확인하는 공동선언서 채택. -> 이 회의에 배석원 자격으로 참석한 중국 캉성(康生)은 "미국이 여전히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타이완 해방은 미국의 방해 공작으로 완수되지 않았다. 흐루시초프의 낙관적인 평화공존론으로 대미 유화 정책이 대두되고 있다."고 평화 공존론 비판. 또 수정주의에 대해 비난을 가하였고 레닌주의의 정당성을 신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이에 대하여 소련의 쿠시넨(Kwusinen)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은 한낱 낡은 교조(敎條)로 화석화(化石化)할 것이 아니라 항상 변천하는 새로운 역사 상황에 보조를 맞추어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며 흐루시초프야말로 현 역사 상황에 가장 알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공로자이며 그의 평화공존론은 현 국제정세에 가장 합당하도록 레닌주의 외교정책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신노선이라고 중국에 대해 반박하였다. 

 

* 공산진영의 분열.

: 공산권은 친소파와 친중파로 갈라졌다.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친소 노선이었으나 유고슬라비아는 중립을 지켰고 알바니아는 친중으로 돌아섰다.

: 쿠바, 베트남, 라오스,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토고, 남예멘, 앙골라, 모잠비크, 콩고 공화국은 친소파. 소말리아는 1977년까지는 친소파였다가 중국 쪽으로 선회했다.

: 캄보디아는 1979년까지는 친중이었다가 친소로 바뀌었다.

 

▣ 1971.12.11(토) 모든 사람이 소원하는 이상 세계. 로스엔젤레스.

052-016 공산주의 세계를 놓고 보면 스탈린과 소련은 그들의 슬라브 민족을 중심 삼고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공에서도 모택동은 전체 공산권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중공이 분열된 것입니다.

 

 

▶ 中蘇 紛爭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공산주의 이념의 원칙적인 여러 문제에 관해 벌인 분쟁을 말한다.

 

* 발단

- 1958년부터 시작되는 중국의 제2차 5개년 계획에 적극 후원하겠다던 소련이 전혀 실천에 옮기지 않은 점.

-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 해협 위기 상황을 조성했을 때 소련은 표면적으로 지지를 표현했으나 실질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점.

- 중화인민공화국과 인도 국경 분쟁 때 소련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 점.  

 

- 1960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기구(1955.5.14. 동구권 8개 국가의 군사동맹조약기구) 회의에서는 1956년 채택된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을 재확인하는 공동선언서를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 배석원 자격으로 참석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 캉성은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비판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캉성은 "미국이 여전히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타이완 해방은 미국의 방해 공작으로 완수되지 않았다. 흐루쇼프의 낙관적인 평화공존론으로 대미 유화 정책이 대두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의 쿠시넨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은 한낱 낡은 교조로 화석화할 것이 아니라 항상 변천하는 새로운 역사 상황에 보조를 맞추어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반박했다.

 

* 수정주의의 친소파와 반수정주의의 친중파로 분열.

 

- 친소파: 쿠바 베트남 라오스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토고 남예멘 앙골라 모잠비크 콩고 등은 소련 지지.  

- 친중파: 알바니아. 소말리아는 1979년에 친중파로 선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