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5.17(일) 천국을 찾아 이루려는 슬픈 아버지와 아들딸. 전본부교회.
006-203 인간 시조가 실락원의 슬픔을 체휼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들에게는 마음의 슬픔이 있고 몸의 슬픔이 있고 생활의 슬픔이 있게 되었고 그 슬픔은 전 세계와 하늘까지 연하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한 목적을 추구해야 할 우리 인간들이 두 목적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함으호 말미암아 한분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대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 외에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 인간은 두 목적의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생활을 통하여 체휼하는 바이고 그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인간은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 삼고 하나의 목적과 하나의 이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였는데 타락한 그날부터는 두 주인을 대하고 두 목적의 이념을 바라보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악은 내 한 개체의 환경권만이 아니고 전 세계에까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에까지 이런 인연이 미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006-206 인간의 슬픔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졌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늘의 슬픔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빚어졌다 할진대 이 슬픔을 해원할 수 있는 한날을 예고하는 어떠한 뜻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사람이 있어야 함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고 이 일을 책임하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던 분이 종교적으로 보면 도의 책임을 진 자인 것입니다.
006-210 우리들의 최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은 천적인 인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006-212 역사적으로는 무엇을 통하여 하늘이 인간을 찾아 주셨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찾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믿음의 조건을 세우게 하시는 한편 인간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하셨느냐? 실천을 요구했습니다.
하늘과 내가 인연되어 슬픔의 감정을 제거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서는 믿음을 중심 삼고 하나의 실천적인 행로가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역사적인 인연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006-217 통일교회는 본래 험한 길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바라볼 때 환영하는 마음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영하기보다는 주저た躊躇う、めらう하는 마음을 갖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 편안한 길 가기 원하는 사람은 이 길로 오지 마십시오. 내가 걷고 보니 그 걸음은 친구가 없는 외로운 걸음이요 동지가 없는 걸음이요 사정을 통할 수 없는 걸음이요 의지할 수 없는 걸음이요 믿을 수 없는 걸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걷고 보니 그런 곡절을 지니고 계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오늘날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먼저 슬픈 면의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시간도 잊어버리고 슬픈 가슴을 붙안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몰리며 쫓겨 다니시던 예수님, 그 시대의 어느 누가 그의 심정을 알고 친구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늘은 서러운 하늘이었습니다. 하늘을 대신하고자 했던 선지자도 서러운 제물이었는데 예수님마저 죽게 되니 뜻을 품고 계셨던 하늘, 그 하늘은 서러운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이 누구인가? 알고 보니 아버지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알고 보니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였습니다.
우리 인류는 아버지의 서러움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그 서러운 심정을 알려 줘야 할 책임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왔고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006-218 제가 알건대는 예수님은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몇 군데밖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남모르는 눈물을 많이 흘리신 분입니다.
산천을 바라보고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요 널려져 있는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요 무한한 하늘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신 분이었습니다.
책임을 지워 놓고 실천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 것을 바라보시면 더욱 슬픈 심정을 가지셨고 그 위에 또 하늘을 위로해야 할 입장에서 위로해 드리지 못한 슬픔, 인간을 구원해야 할 구주의 책임을 감당치 못해서 가해지는 슬픔 등 그는 진정 슬픔의 왕자이셨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만왕의 왕자 영광의 왕자 승리의 왕자이기보다도 슬픔의 왕자이십니다. 뜻을 위한 슬픔의 왕자이심을 우리는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006-221 무엇보다 나를 더 사랑하라는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너를 믿어 주고 너를 사랑하겠다는 것이요 또 하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006-226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리에 들어가 하늘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게 되면 온 우주를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내 몸에 대한 의식을 잊어버리고 그 아버지를 믿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믿게 될 때에 자기 감정이 없어집니다.
이제 내 아버지를 원수시했던 사탄 대한 분개심을 품고 그에게 심판의 일격을 가한 후 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버지!" 하고 부르며 아버지를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기쁨과 서러움에 사무쳐 울고 난 신앙자라야만 천국생활 이념시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세계에서 모심의 생활을 해야 할 우리입니다. 소망의 천국은 맞이했으나 모시고 실천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천국은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즉 생활적인 주체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006-228 하늘은 예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하셨습니다.
* 관념상으로는 신의 실존하심을 알고 있고 대상적인 신앙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알았으나 직접적으로 내 양심의 주체요 내 몸의 주체요 내 생활의 주체요 내 생활권내에서 찾아지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이 실존하고 계시가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신앙의 한계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또 사랑의 심정과 접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복귀해야 할 사명을 짊어진 끝날의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어떠한 희생 어떠한 어려움 어떠한 핍박이 있더라도 천성의 슬픔과 천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겠다는 심정에 사무쳐 하늘의 깃발을 들고 나서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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