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 심령 통일 용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순간에 가슴 아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true2020 2018. 5. 2. 13:55

▣ 1960.5.8(일)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사는 자가 되자. 전본부교회.

009-185 救援攝理가 웬말입니까? 내게 救援이라는 말이 웬 말입니까? 구원이라는 말이 필요 없어야 할 것인데 이 구원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슬픈 명사입니다.

 

내게 구주란 말이 웬 말입니까? 구주 없던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는 어디 갔습니까? 본연의 아담 해와도 구주가 필요했습니까? 예수가 필요했느냐 말이에요.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기도니 종교니 도덕이니 수양이니 무슨 세계관이니 하는 것 다 필요 없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아담주의가 세계주의요, 하나님주의입니다.

 

*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순간에 가슴 아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 몇 십 년을 통곡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그런 것을 느껴야 됩니다. 

 

아버지의 심정은 이러했는데 아담 해와가 그 심정을 모르고 타락할 때 마음 아파하시던 심정을 느껴야 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1600년 만에 노아를 세워 120년 동안 수고하게 하셨으나 그의 아들 함이 타락한 입장에 서는 것을 바라보셔야 했던 그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 예수는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체면을 생각지 않고 붙들고 눈물짓는 자리입니다. 찾아오시던 아버지와 찾아가던 아들이 상봉하여 서로를 염려하면서 붙들고 우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있습니까? 회개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슨 죄, 무슨 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몰랐던 것을 회개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의 돈을 다 써 버리고 별의별 짓을 다하고 다니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큰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이까짓 것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이 죄를 어떻게 용서받겠습니까" 하고 눈물짓는 자식이 있다면 그 아버지는 "오냐, 오냐" 하며 용서해 줄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렇듯이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 심정을 유리한 죄 이상 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유리한 죄인이요, 만물의 심정을 거부한 죄인이요, 심정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게 한 방해꾼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여러분이 알고 심정을 걸어 놓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슬픔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 이제는 그만 슬퍼하시고, 그만 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픈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기쁜 자리로 옮겨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서로 웃고 기뻐하며 사는 곳이 지상천국이요, 그런 아들딸이 사는 곳이 우리들의 본향이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살던 본연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