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1.10.24(일) 시대적인 우리의 위치. 전 본부교회.
049-343 내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어요. 친구 결혼식 날인데 내가 들러리를 섰다구요. 그때가 왜정 때인데 목포에서 일등 가는 부잣집의 외동딸이 시집가는 데 말이야, 내가 들러리도 다 서 봤어요.
나는 평안북도 정주에 있었는데 결혼식하는 데는 釜山이라구. 방학 때여서 내가 고향에 가 있다가 전보를 받았는데, 들러리 할 때 필요한 일체는 여기에서 다 준비했으니 들러리 준비는 불필요하다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선생님이 준비할 것이 뭐야. 그때는 사람들이 국방복을 입던 때라서 그것을 입고 잔칫날에 그곳을 찾아간 거라구. 떡 찾아가 보니까, 큰 잔치판이 벌어졌어요.
그때는 들러리가 요즘처럼 뭐 모닝코트 morning coat(남자가 낮 동안 입는 서양식 예복, frock coat)니 하는 것을 입지 않았습니다. 예복 같은 것을 입지 않고 국방복을 입고 그냥 그대로 꽃을 달고 식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구. 그런데 그곳에 가 보니까 신식 결혼식이 떡 벌어졌더라구요.
그래 가지고 들러리 옷이라고 준비해 놨는데, 그것을 떡 입으니 이렇게 되었어요. 그 옷을 내가 입겠다고 해서 입은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이 옷을 하나씩 골라 가지고 입었는데 다 맞는데 내 것만 떡 그렇게 됐더라구.
크고 작은 것이 있기나 하면 바꿔 입을 수도 있을 텐데, 바꿔도 못 입게 딱 그 옷만 있으니 할 수 있어요? 이것도 내 팔자로다. 별 수 있나 그래 가지고 그걸 그렇게 입고···. 이래도 나와 이게. 그때, 그 와이샤츠는 왜 그렇게 긴지. 그때 일이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 뭐 잔치에 들러리가 아니…, 아줌마가 바라봐도 아저씨가 바라봐도…. 잔치하는 주인부터 색시, 新郞 할 것 없이 전부 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잔치에서는 빵점이라구.
* 내가 해 입고 갔더라면 결혼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예복 중에 세계사에 남을 수 있는 기록이 될 텐데 해 준 것을 입었으니 이건 뭐 여기도 못 믿고 저기도 못 믿는 거라구요. 그렇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같이 그 환경에 어울리지 못하면 거북할 때가 있지요? 거북한 것이 극하여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더 낫다 하는 때를 맞이해 봤어요? 이거 뭐 어쩔 수 없는 그런….
* 자, 인간세계에서도 그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永遠히 因緣된 그 한 곳, 그곳은 一生을 바쳐서 찾아가 머물기를 所願하던 곳인데 그곳에 가 가지고 그런 창피를 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 1972.7.2(일) 우리의 처지. 전본부교회.
059-048 내가 스물 몇 살 때일이에요. 우리 친구가 있었는데 목포에서 제일 갑부였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그 집에 찾아가게 되면 다 알고 인사도 할 수 있고 쉴 수도 있는 입장입니다. 그 친구가 어느 집 외동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왜정시대라 전부 다 국방색 옷을 입을 때입니다. 그때는 무슨 예복이니 뭐니 입고 예식을 하지 않을 때예요. 그래도 목표를 대표할 수 있는 도 평의회, 그때로 말하면 도 의원이지요. 그런 입장에서 도지사부터 한다는 패들이 전부 다 모이는···.
그때는 왜정 때이지만, 난시지만, 전시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국방색 옷을 입고는 결혼식을 하는 곳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응당히 그럴 줄 알고 갔다구요. 그때는 결혼식하게 되면 사회 풍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시책이 그렇기 때문에 그럴 줄 알고 떡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라는 사람이 말이에요, 들러리로 서는 사람이 친구 세 사람이었다구요. 그 세 사람 옷을 마련했는데 그 옷을 보통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똑같이 마련을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선생님이 몸집도 얼마 크지 않을 것 같고 보통 사람 같지요?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으면 여기밖에 안 오고 여기밖에 안 와요.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가도 김일 선수 정도의 사이즈가 아니면 맞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둘레가 이렇구 상당히 그렇다구요. 선생님이 다른 남자들처럼 어깨는 이렇게 족 빠졌지만 엉덩이가 큽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세밀히 보는지 모르지만 나만큼 모를 거예요.
이제 한두 시간 후에는 식이 벌어질 텐데 거기에 가니까 도에서 저명한 사람들이 전부 다 예복을 입고 격식을 갖추어 가지고 머여 들었습니다. 전쟁 때지만 옛날에 준비해 놓았던 옷들을 입고 다 나서는데 내 옷 입은 것을 보니 내가 봐도 이 옷이···. 거울을 보니 이것 죽지도 못하고 도망도 못 가겠고···.
자, 그 옷을 입어 놓으니 말이에요, 와이셔츠는 이렇게 되고 웃옷은 이렇게 짧아서 이것을 잡아당기려니 여기가 그렇지, 이래 가지고 이게 맞지 않지···.
그때의 창피함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주 실감납니다. 그걸 보면 선생님도 끔찍이나 체면을 생각하고 그런 환경에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에 대한 감정이 예민한 사나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참 빠릅니다. 벌써 척 보면 저 사람은 틀렸다, 대번이 안다구요.
▣ 1990.10.14(일) 3대 왕권과 탕감복귀. 코디악. 주일 경배식 후,
- 한국의 시군 교회 책임자.
206-307 내가 한 가지 逸話를 말하지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 친구 녀석이 왜정 때 목포의 일등 부잣집 딸하고 결혼했다구요. 木浦 북부가 전부 다 그 사람 땅이었어요. 그때 新婦 아버지가 全羅南道 道議員이었어요. 親日派지요.
그 외동딸이 결혼하는데 사위가 내 친구라구요. 왜정 때는 들러리 같은 것도 서지 못하는 거지요. 전부 다 國民服 입고 結婚할 때라구요. 그런데 부잣집이니까 現代式으로 모닝코트를 입고 結婚式을 하는 겁니다.
* 그때 나는 平安北道 定州에 가 있고 이 녀석 사는 데는 전라북도인가 그래요. 결혼식에 간다고 約束을 했는데, 그때 모닝코트가 있나요? 없지요. 그러니까 신랑네 집에서 전부 다 했어요.
* 그런데 내 키는 신랑 키만 하지만 내가 몸이 뚱뚱한 것을 몰랐거든. 자기 신랑을 표준해 가지고 사이즈를 맞췄는데 몸이 크다 보니 와이셔츠가 꽉 끼고, 코트가 꽉 끼게 되었어요. 들러리를 세 사람씩 섰는데.
* 그래 가지고 어디 가서 서 있겠어요? 그거 얼마나 기가 찬 일이에요. 와이셔츠도 배꼽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시간은 됐는데 逃亡갈 수도 없고 안 입을 수도 없고 그것을 입고 나타났을 때의 그 창피함! 그거 逃亡가야 되겠어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팔을 자르지도 못하고 몸뚱이를 깎아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기에 참석 안 할 수도 없는 거예요.
* 그때 거기에 步調를 맞추려고 했던 내 모든 신상의 거북함이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아요. 거기에 어울리지 못한 그 悲慘함을 잘 알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남들은 고운 옷 다 꺼내 입고 그랬을 텐데, 꿰맨 옷을 그냥 그대로 입고 나타난 그 마음은 얼마나 기가 차겠나 이겁니다. 그때 그걸 보니 옛날 친구 결혼식 때의 일이 생각나더라구요.
* 나라를 가졌으면 뜻을 위하고 정성을 다하는 모든 사람을 애국자의 반열에 세워 만민이 追慕하는 모임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기가 막히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손으로 가리던 것이 그들 앞에 책임 못한 책임자의 부끄러움이에요. 어떻게 앉아서 밥상을 대하고 밥을 먹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선생님은 그런 생애를 걸어온 것입니다.
▣ 1991.1.20(일) 내 고향과 내 집. 본부교회.
213-195 일제 때 일본에서 명문 대학을 나온 우리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목포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외동딸한테 장가를 가게 되었어요. 그때는 요즘처럼 禮服을 입고 신식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軍服 입고 꽃 하나 달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부잣집이니까 도지사로부터 전부 다 불러와 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딸 결혼식을 하는데 나한테 들러리를 서 달라고 해서 내가 친구로서 들러리를 서러 갔다구요.
* 갔는데 돈이 많으니까 양복점을 택해 가지고 들러리 설 때 입을 禮服과 나비넥타이랑 와이셔츠랑 양말을 다 만들어 놓았어요. 사위 키를 중심 삼고. 그 친구 키가 얼마나 크냐 하면 나만 해요. 키가 나와 거의 비슷해요. 그래서 사위를 중심 삼고 그 사이즈로 와이셔츠를 떡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런데 내 몸뚱이가 얼마나 두꺼워요? 이렇게 두껍거든요. 햐, 이걸 입어 보니까 뺑뺑해 가지고 들어갔다가는 그냥 빠져나와요.
* 얼마나 창피하던지, 이래 가지고 이렇게 오그리고 서 있었던 일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까지도. 아이고, 창피했던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말이에요.
* 그것이 내게 큰 敎訓이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하게 되면···, 그때가 7월이었어요. 더운데 땀을 흘리면서 이래 가지고 들러리 섰던 그 생각을 하면 "야, 지옥이 이와 같이 어려운 곳일 것이다" 하고 언제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축에 못 들어가고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모릅니다.
자연스럽게 동서남북을 버젓하게 천하 어디를 가든지 하늘나라에 가나 지상세계에 가나 당당할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들딸이 돼야 돼요. 이게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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