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선덕여왕

true2020 2017. 9. 13. 13:04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2월 17일(음력 1월 8일), 재위: 632년 ~ 647년) 또는 선덕왕(善德王)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金), 덕만(德曼)이다. 진평왕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의 딸이며, 진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중인 632년부터 633년까지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634년 인평(仁平)으로 개원하였다.



▶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신라 제26대 왕 진평왕의 왕비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복힐구(福肹口), 27대 왕 선덕여왕의 모후이다. 마야 부인의 이름은 석가모니(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에서 따왔다. 법흥왕 때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라 왕족의 이름을 불교적 요소, 의미를 포함하는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진평왕과의 사이에서 2녀만을 두었다.


남편: 진평왕(眞平王)

  • 딸: 선덕여왕(덕만공주, 善德女王)
  • 딸: 천명공주(天明公主)

    • 외손자: 태종 무열왕
  • 딸: 선화공주(善花公主) - 삼국유사에서만 등장.



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한 재위 기간에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妙寺) 등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 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미리 안 세가지 일(善德王知幾三事)"이 수록되어 있다.

1) 당 태종의 모란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2) 여근곡의 백제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를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3) 왕의 승하와 도리천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679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기타 일화

  •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 (삼국사기645년으로 기록)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여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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