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1.11(일) 신의 섭리 노정과 인간의 생활 노정. 미국.
161-109 이 세상 사람들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신과 더불어 사는 교회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락한 인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볼 때 지금 우리가 대하고 있는 神은 어떤 神이냐? 救援攝理를 하고 있는 神입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 기성교회 특히 기독교를 말하면 기독교 생활을 두고 보면 신앙생활 따로 인간생활 따로 대개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회는 다릅니다. 다른 것이 뭐냐면 신앙생활이자 실제생활이 되게 一元化 運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 지상에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구원 섭리의 理想을 이룰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일반 기성교회에서는 苦行이라든가 修行이라는 것을 하는데 그것은 전부 다 이 사회와 격리隔離해서 모든 것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사회 가운데서의 종교화 운동이 중요하다, 이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여기에서 생각해야 될 것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 전에도 계셨고 타락 이후에도 계시지만 지금 섭리를 대하고 있는 하나님의 칸셉이라는 것은 타락한 인간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어버리기 쉬워요.
그러면 문제는 하나님이 타락한 세계에 들어와서 일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을 중심 삼고 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래 이상하던 생각을 중심 삼고 하나님화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구원섭리 운동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됩니다.
161-111 나에게는 본심의 생각이 있고 본심에 반항하는 타락성의 생각, 이 두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예요. 어째서 인간에게 두 마음이 있게 되었느냐? 이건 철학적인 思考를 통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입니다.
深刻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마음이 두 마음인 것을 볼 때 근본이 두 마음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타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오늘날 종교라는 것이 나와 가지고 偉大한 貢獻을 한 것이 뭐냐? 특히 基督敎를 중심한 聖經이 나와 가지고 偉大한 貢獻을 한 것이 뭐냐 하면 이와 같은 두 생각 가운데서 고민하는 인간 앞에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또 다른 이런 마음이 생겼다"고 한 거예요. 이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그 개념이 어디로부터 왔느냐? 종교로부터 왔습니다. 종교는 어디서부터? 신으로부터 왔다 이것입니다.
오늘날 일반 사람들이 그걸 모르니 타락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사실, 타락이라는 것이 인류 역사에 있어서 얼마나 무섭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어려운 섭리 노정의 길을 거쳐왔는가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라구요. 우리 인류 시조가 타락했어요. 그때부터 타락의 習慣이라는 것이 우리 육신의 血統을 통해서 固質化되어 50억 인류로 繁植될 때까지 따라 나왔다 이거예요. 그것이 높다면 히말라야 산보다 높고 황폐하다면 사하라 사막보다 더 하고 대양이라면 태평양보다도 넓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요.
* 그런 習慣的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생각도 안 해요. 그 짐을 벗을 수 있고 그 길을 돌파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을 주고라도···. 돈이 있으면 천하의 돈을 다 주고라도 또 값진 무슨 보물이 있다면 보물을 다 주고라도 벗어야 할 짐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통일교회 식구된 여러분 이런 생각해 봤어요? 그런 짐을 내가 지고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런 짐에 눌려 있고 포위된 내 가운데 본성이라는 본심이 있어 가지고 점령당하지 않고 어느 때든지 그 밑에서 솟구쳐 머리를 들고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두 사람이 있는 걸 바라볼 때 여러분 자신은 어느 사람 편이 될 것이냐? (본심.) 대답은 쉬워요. 본심이라고 대답하기는 쉽습니다. 이 본심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겠어요? 본심의 사람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게나 생각해 보라구요. 얼마나 상처를 입었겠나. 그 본심이 사람이라면 본심의 눈이 어떻겠고 귀가 있으면 어떻겠고 입이 있으면 어떻겠고 또 마음이 있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사도 바울같은 양반도 그러지 않았어요? "내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몸은 이 세상의 죄악의 법을 따른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이 싸움터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리요" 하고 탄식했다구요. 누가 나를 해방시켜 주느냐 이거예요. 그 본심의 사람은 해방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해방해 주겠느냐 이것입니다.
※ 로마서 7장
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또는 행할 능은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고착되어 있는 이것을 저나라에 가더라도 떼어 버려야 됩니다. 언젠가는 떼어 버려야 돼요. 청산 지어야 됩니다. 언제라도. 이것이 이 땅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땅에서 청산해야 됩니다. 저나라에서는 청산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 영계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천국을 알고 직접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긴 가야 할 텐데 못 가는 신세라구요. 그 초라함みずぼらしさ과 비참함이 얼마나 크겠어요? 세상의 어떠한 비참함보다도 역사시대의 어떤 누구의 비참함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자아를 발견하는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느냐 이거예요. 알겠어요?
* 종교는 고행길을 가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좋아하는 것은 발로 차 버려라 이거예요. 육적 눈이 좋아하는 대로 가다 보면 마음적 눈을 싫어하는 거예요. 전부 반대예요. 가만히 생각하면 말이에요, 인간이 모순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도 타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모순된 자아발견, 이게 위대한 발견이라는 거예요. 이게 역사에 있어서 어떠한 발견보다도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돼요. 타락이 어떻게 됐는지 안다고 하면 그것이 보다 놀라운 것입니다.
이 혼돈 가운데서 어떻게 해방된다는 길이 있다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가야 할 책임 노정입니다.
※ 원리강론
70 인간이 이 악을 발본색원함으로써 인류 죄악사를 청산하고 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이 사탄된 동기와 경로와 그 결과를 알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161-113 자, 하나님의 섭리 노정과 인간 생활 노정인데 여러분의 하루 생활 노정에 있어서 그 생활이 본심이 원하는 생활이냐 아니면 본심에 얼마나 상충되는 생활이냐 이거예요. 본심에 상충하지요? 본심이 하나님의 뜻이 아녜요?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얼마나 불충스럽고 부합되지 못한 자아인가를 여기서 새로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활사로 미루어 봐서 알 수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좋은 것만을 기억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은? 구원 섭리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겠어요? 보기도 싫은 거예요. 보기도 생각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자식이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하고 있는데, 감옥에 들어가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자식을 좋아할 부모가 있어요?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비참해요? 아들보다도 더 비참함을 느끼고 심적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타락한 혈통을 통한 같은 입장에서 사는 땅 위의 부모도 그렇거든 본성의 주인되고 근원되는 하나님의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크겠어요? 그걸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의 배후에서 섭리해 나온 하나님의 그 곡절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우리는 그걸 알아야 됩니다.
* 섭리의 뜻을 대하는 하나님을 부를 때는 통곡에 사무치는 심정을 가지지 않고는 부를 수 없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기를 "悔改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한 것입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섭리의 뜻을 대하는 입장에 있어서 얼마나 무례했고 얼마나 체면 없고 뻔뻔스러웠느냐 이거예요.
161-116 하나님은 全知全能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의 大王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안 했으면 혼자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좋아했겠나 어떠했겠나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 혼자서는 하나님 노릇 못하는 거예요. 거, 무슨 재미예요?
* 아무리 여자가 미인으로 생겼다 하더라도 혼자 살아 보라구요. 그거 얼마나 박복하겠어요?
* 그러나 못생긴 남자라도 있어 가지고 좋아하고 이래야 여자가 빛이 나는 거예요. "I love you" 하고, "You are beautiful" 이렇게 남자가 여자 앞에 그래야지.
* 그러니까 싫든 좋든 못생겼더라도 상대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아하, 하나님도 별수없이 상대가 필요하겠구나." 하는 개념을 정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걸 실감해야 됩니다. 여러분 눈이 있으면 뭘 해요? 대상세계가 없으면 눈이 있어서 뭘해요? 상대가 없으면 눈이 암만….
* 상대가 있으니 눈이 필요한 거예요.
* 그럼 상대를 만드는데 어리석은 사람을 만들겠어요? 자기가 만드는데 말이에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까 자기보다도 더 지혜롭고, 자기보다도 더 훌륭하게 만들고 싶지 않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지혜롭고, 상대가 될 수 있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라구요.
* 하나님이 만물을 다 짓는데 만물의 주인을 짓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센터를 짓지 않을 수 없는데, 사람이 그 센터예요. 사람을 표준해 가지고 다 지었어요. 사람을 중심 삼고 본떠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자기를 본따 가지고 만든 것처럼 사람을 본따 가지고 만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상대를 필요로 하니 만물도 전부 상대적으로 지었습니다. 상대 없는 것이 없다 이거예요.
안 그러면 피조만물이 참소해요. "하나님,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었는데 왜 우리는 상대 없이 지었소?" 이렇게 참소한다는 거예요. 그거 다 알았다는 거예요. 벌써.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Pair system.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건 놀라운 사실이에요. Pair system.
자기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되었어요? 그 개념이 어디서 왔느냐 이거예요. 눈도 쌍, 코도 쌍, 귀도 쌍, 다 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여자가 됐으면 남편을 사랑하고 남자가 됐으면 여자를 사랑해 봐야 됩니다.
161-116 이게 Love Ladder예요. 사다리와 마찬가지예요. 전부 다 쌍으로 돼 있다구요. 전부가. 이게 점점 커 가는 거예요. 이게 사랑이에요. 이렇게 쭉-. 이건 남성 플러스고 여긴 마이너스고 전부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있는 것은 여기에 올라가는 것이 이상이고, 여기 있는 것은 여기에 올라가는 것이 이상이고 더 큰 데로 올라가는 것이 이상입니다.
최고, 이 최고는 뭐예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뭘 하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더 높은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입니다.
존재하는 목적이 뭐냐? 왜 존재하느냐? 더 높은 사랑을 찾아가기 위한 것이 존재 목적입니다. 그래서 낮은 계급은 윗 계급한테 먹히게 돼 있습니다. 다아윈의 진화론은 그것을 사랑으로 보지 않고 약육강식으로 보았어요. 그건 모르는 말이에요.
* 그러니까 모든 존재물은 낮은 급에 있는 생명은 높은 급에 있는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까지 연결되어 있다구요. 존재의 생명의 가치가 연결되어 있어요. 생명의 가치가 하나님의 사랑권내에 연결되는 것이 모든 존재의 희망입니다.
여기 벌레가 있으면 여기에 구성된 요소가 흡수되어 인간의 요소로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그 요소로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더 높은 사랑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 그 존재의 영광이요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Glory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틀림없는 거예요. 共通分母예요. 참사랑을 위해서는 다 犧牲하려고 합니다.
* 그러니까 사랑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사랑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자기를 희생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참사랑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건 우주의 공식입니다. 그래서 레버런 문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생명을 각오하고 이 놀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먹는 것을 중심 삼고 이 물에게도 "너도 하나님의 사랑에 도달하고 싶지?" 하면 "예." 한다구요. 사랑 앞에 모든 식물이 먹히려고 합니다. 먹어 주길 바라는 거예요.
* 하나님도 사랑 때문에 희생해야 됩니다. 하나님 자신도 제물이 되어야 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불평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유의 존재는 어느 하나도 불평을 안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참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것은 다 공통분모입니다. 공통분모예요.
* 이렇게 사랑으로 먹게 되면 절대 병이 안 납니다. 이런 관계를 가지고 먹고, 입는 데서는 병이 안 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참사랑한테 지배를 받게 되어 있지 참사랑을 지배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사망도 어떠한 균도 지배하지 못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사랑 앞에는 꼼짝 못합니다.
161-120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 놓고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딸을 낳는 게 뭐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얼마나 재미있었겠는가를 가르쳐 주는 교훈이에요. 교본입니다. 자기 아내가 임신했다 하면 남편도 아내도 흥분합니다. 배 속에서 움직이는 그런 창조 과정···. 여기에 관심이 모입니다.
161-121 사람이 아무리 완성했다 해도 하나님을 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모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려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려 하고 이렇게 서로가 위하려는 자리에서 이상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만을 위하겠다 하고 네가 너만을 위하겠다"고 해서는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데서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만을 위하는 개념이 있으니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 원수.
원수가 됐더라도 그 원수를 위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위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반대할 때는 말이에요, 그때는 제재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가운데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지당하다는 겁니다.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관을 중심 삼고 볼 때 타당한 이야기라구요.
* 천국은 위해 살지 못한 사람은 못 가는 데예요. 천국 갈 자신 있어요?
* 그러면 타락하지 않았으면 천국 가서 뭘 했을까요? 천국을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서로 위하기 때문에 몇억천만 수천억의 사람이 있더라도 사고가 안 납니다. 싸움이 없어요. 우주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 사는 사람은 우주가 자기 것이라는 걸 알아요. 우주가 내 것 된다는 걸 안다구요. 자기를 위하면 자기밖에 없어요. 그거밖에 없다구요.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 거기에서는 뭐 밥 먹을 것이 걱정이겠어요? 대답해 봐요. 밥 먹을 게 걱정이지요? 옷이 문제예요? 집이 필요해요? 그런 거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건 언제나 공급받습니다. 언제나 공급받아요.
* 그래, 영원히 살면서 뭘 하고 싶어요? 뭘 할 거예요? 무엇을 원할래요?
161-123 하나님의 사랑 앞에, Cod‘s Love, 여기에 가까이 가는 것이 이상입니다.
* 그러려면 하늘땅과 우주를 하나님처럼 사랑할 줄 알면 하나님화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예요.
* 나 하나 물어볼게요. 어머님이 선생님을 더 사랑할 것 같아요, 내가 어머님을 더 사랑할 것 같아요? 응? 어머님은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가르쳐 줘야 돼요. 이렇게 이렇게···. 언제나 그렇게 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갈라놓으면 천지가 갈라지고 하늘땅이 갈라지고 모든 피해가 오고 우주가 흑암 세계로 된다구요. 사랑의 길이 이렇게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돼요.
그래, 어머니가 행복한 여자예요 불행한 여자예요? 또 선생님은? 행복한 여자를 가진 선생님은 어떤가요?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 하나님을 볼 때 행복한 아들딸을 가졌으니 하나님도 행복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이해돼요?
"아! 이래서 남자 여자를 만들어 놓았구만! 하나님이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서 남자 여자를 만들었구만! 하나님이 이 우주를 상속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우주는 하나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 해도 좋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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