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의 각오. ▣ 1969.11.30(일) 전본부교회.

true2020 2017. 7. 1. 10:35

1969.11.30(일) 전본부교회. 신앙자의 각오

027-093 오늘날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생사문제나 행 불행의 문제를 자유로이 가려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운명길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해결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幸福이라든가 不幸이라든가 혹은 生死 등의 전체적인 문제는 물론, 인간을 중심 삼고 벌어지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그 모든 문제의 解決 要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사망선이나 불행의 고비를 어떻게 타개하느냐 하문 문제를 생각해 볼 때 그 불행이라는 것은 자기가 서 있는 현 시점보다도 낮은 위치 혹은 열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 열이라는 힘을 지니고 있는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낮은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해 가기 위해서는 열이라는 힘에 플러스될 수 있는 요인을 어디서 보급받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활 가운데에서 요구되는 절대적 요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027-095 자기가 바라는 소원을 믿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원보다 더 큰 原動力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소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바라고 또 추구하는 입장이 바로 신앙자의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자의 생활방법입니다.

 

* 오늘날 제한된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으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제한된 권내를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초월하기 위해서는 자기 힘만으로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거기에는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자의 각오를 중심 삼고 볼 때 그 신앙자의 각오를 하는 데 있어서도 精誠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제 한다"라는 그 결정 자체 즉 신앙자로서 목표를 중심 삼고 결정하는 그 자체에도 정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성은 지금까지의 상습적인 생활 환경권의 내용만 가지고는 안 되며 그 이상의 기준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027-097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의 모든 감각을 거기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상습적인 생활을 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즉 이목구비와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 전체를 한 중심에 집중시켜야 됩니다. 통일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거기에 집중시킬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하지 않으면 현재의 입장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격 말씀에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12:30)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다하라는 말에는 천주적인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소원 즉 바라는 것을 성취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027-098 신앙자의 입장은 單純하다면 지극히 단순한 것이요, 複雜하다면 최고로 복잡한 것입니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한 길로 곧장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잘못해 떨어졌다 하게 되면 千態萬象의 曲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잡하다면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자가 가는 길은 絶頂을 향한 길입니다.

 

* 그러므로 신앙인은 그 境地를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아침에 나설 때, 자기의 마음과 하루의 목표는 어디를 향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고 나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출발하는 아침보다도 저녁에 돌아올 때, 혹은 하루를 지내고 나서 잠자리에 들게 될 때 "나는 오늘 좋았다. 오늘은 다행했다. 뜻 앞에 내 면목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이 한 달을 대신할 수 있고 이 한해를 대신해서 자랑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熾烈한 鬪爭이 없이는 그런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呼吸을 하고 있지만 평상시에는 그것을 잘 못 느낍니다. 또 자기의 가슴에 맥박이 뛰고 있다고 하는 것이 여실한 사실이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마음속 깊은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된 사실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도 그것을 인식하려고 해야 느껴집니다. 또 하나님이 내 마음속 깊은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집중해야 느낄 수 있거늘,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정신을 가다듬지 않고는 좀처럼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분명히 존재하십니다.

 

027-099 하나님은 우리를 불행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행복의 길로 안내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지백체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괴로운 자리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027-100 신앙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입니다. "나는 기필코 이 길을 가겠다"하는 뚜렷한 목표예요. 이 목표가 흐려질 때 신앙자의 생활은 무너지는 것이요, 아무리 결의를 하고 각오를 해도 목적과는 何等의 關係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도 없이 백 번 각오하면 뭐 합니까? 목표를 뚜렷이 정해 놓고 백 번 결의해야 목표 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지는 것이지 목표가 희미해 가지고는 아무리 결의를 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027-103 신앙자는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산맥을 따라 주봉을 향하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봉을 향하여 가는 데는 여러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의 큰 산이 있으면 그 산의 주봉을 중심 삼고 사방으로 산맥이 뻗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산맥은 중간에서 절벽이 되어 도저히 가려야 갈 수 없는 산맥도 있을 것입니다.

 

*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주봉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야 할 목적지, 신앙의 중심 목적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것도 모르고 신앙길을 간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027-105 신앙길이라는 것은 복잡한 길입니다. 제일 겁나는 길입니다. 한번 가다가 실수하면 후퇴해서 다시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것으로 마지막입니다. 한번 출발했으면 끝까지 가야 할 길입니다. 가다 말다 하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한번 떨어지는 날에는 크나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번 기운을 잃어버린 사람은 다시 회생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길은 가다가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다른 길로 피해 갈 수 있지만 신앙의 길은 가다가 떨어지면 대절벽이기 때문에 소생할 길이 없습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이 없는 신앙관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산맥을 타고 나는 저 주봉을 향해 가겠다. 내 일생을 두고 가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하고 가겠다"고 하면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나섰으면 밤이나 낮이나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섰을 때는 거기에 준비한 모든 전체를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입하는 데 있어서도 있는 정성을 다해 가지고 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027-108 그렇기 때문에 신앙자에게는 覺悟(앞으로 닥칠 일에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함, 또는 그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등에 업힌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마가복음 9장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1 そこで、イエスが父親に「いつごろから、こんなになったのか」と尋ねられると、父親は答えた、「幼い時からです。

21 And he asked his father, How long is it ago since this came unto him? And he said, Of a child.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2 霊はたびたび、この子を火の中、水の中に投げ入れて、殺そうとしました。しかしできますれば、わたしどもをあわれんでお助けください」。

22 And ofttimes it hath cast him into the fire, and into the waters, to destroy him: but if thou canst do any thing, have compassion on us, and help us.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3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もしできれば、と言うのか。信ずる者には、どんな事でもできる」。

23 Jesus said unto him, If thou canst believe,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that believeth.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24 その子の父親はすぐ叫んで言った、「信じます。不信仰なわたしを、お助けください」。
24 And straightway the father of the child cried out, and said with tears, Lord, I believe; help thou mine unbelief. 

 

그 길을 가는 데에는 모험이 따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정상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길입니다.

 

거기에는 非 字가 몇천 개, 몇만 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면 몇천만 번 싸워야 됩니다. 이 싸움의 길을 초월하려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027-110 신앙자는 목표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생명을 투입해 가느니만큼 그 목표를 자기 생명 이상의 가치로 인정해야 합니다. 중심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가져야 되는 거예요.

 

*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야 돼요.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027-111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나는 간다. 틀림없이 간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는 이러한 세계다. 다른 어떤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 죽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신념이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할 때는 영계에 가서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를 개척해 가야지, 이대로 지체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죽어야 저나라에 가서도 지상에 재림하여 협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영부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생활을 하다 죽어 보십시오. 지상 재림을 할 줄 압니까? 지상 재림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누구라도 지상 재림할 수 있는 줄 아세요? 그런 것은 여러분보다 영계에 있는 영인들이 더 잘 압니다. 그런데 그 영인들이 왜 못 오느냐? 그것은 그들이 땅 위에서 그러한 신념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목표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 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존재여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의 현재의 입장보다 더 낫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인 요구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처음의 신앙의 중심 기준이 불변해야 된다는 겁니다.

 

* 신념이 왔다 갔다 해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신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은 신앙의 목표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한다 해도, 그것은 다 흘러가는 것이 됩니다. 자기 나름대로 아무리 각오와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027-113 신앙자에게는 "제일 험하다"는 말, "어렵게 간다"는 말, "나쁘다"는 말이 필요합니다. "제일 쉽게 간다"는 말, "좋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쁘다는 말을 들어야 해요. 그런 말이 자신을 망하지 않게 하는 관건關鍵(문빗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꼭 있어야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누구 다 좋은 것이지요. 그런 것은 필요 없는 거예요.

 

027-115 여러분, 역적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배반자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심각한가 하는 그 도수에 따라 누구든지 80%, 90% 100%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배반자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본래부터 배반자인 것입니다.

 

이제는 정녕 그런 것을 시험당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원수로부터 올 때, 나는 자신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도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 선생님 들이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참 것을 알았으니 여러분을 鎔鑛爐에 집어넣어 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이고, 이럴 줄 몰랐다"할 것입니까?

 

* 여러분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027-119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고개를 잘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뜻을 중심 삼고 잘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본래의 타락이 사망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해결하고 나서야 합니다. 영계의 지옥에 가서 고생해야 할 것을 현실 지옥에서 탕감하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탕감법입니다.

 

027-121 통일교회는 아무나 오는 곳이 아니요, 아무나 믿을 수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 즉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 나라의 충신 열녀의 혈족으로 태어난 후손들만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부심을 가지세요. "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 이 불행의 요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불행한 자리로 가겠다고 해야만, 하늘이 동정하게 됩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100번 죽겠다고 해야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 동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인연을 갖지 못하면, 이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남아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027-124 한참 격전이 벌어질 때는 적군의 시체도 방어진지가 됩니다. 냄새나는 시체도 방어진지가 된다는 거예요. 그럴 때는 죽어 쓰러진 시체 뒤에 엎드려서라도 공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작전을 하는 거예요. 사탄이 나쁘다고 제시하는 모든 조건을 갖고 공격하는 겁니다. 공격의 재료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소문 잘 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027-128 이 일을 시작한 나는 지금까지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게 생명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 나오면서 죽을 고비를 몇 次例나 거쳤습니다. 그렇게 싸워서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선생님은 비록 영어의 몸이 되어 쇠고랑을 차고 마룻바닥에 누워 자는 한이 있더라도,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원수! 너희가 채찍으로 치려면, 어디 한번 마음껏 쳐 봐라. 네 채찍이 얼마나 강한지 보자. 채찍으로 세계를 요리하는 악의 세력과 권한이 어디까지이냐?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 보자. 쳐 봐라" 이러면서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027-129 그러면 신념을 가져 가지고 뭘 할 것입니까? 생활을 통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 진짜 죽음을 각오하고 가겠다는 신념을 가졌습니까?

 

국경선을 넘어 보아야 되는 거예요. 사탄 세계에 항거를 해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제제를 받아 보아야 하는 거예요. 그 나라의 주권자들로부터 탄압을 받아 보아야 얼마만큼 심각하고 얼마만큼 분하지 알 수 있습니다. 

 

탄압을 안 받아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원수 앞에서 고문도 당해 보고, 그 아들한테도 당해 보고 해야 합니다. 아들과 원수와는 또 다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신념이 있다 하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하냐? 자기 몸뚱이가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며 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