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12.27~1951.1.3 서울 1주일간 체류.
- 1950.12.31 병역소집 신검. 서울 秘苑 앞.
* 1951.1.27 부산 도착
▶ 서울 도착 - 창경원에서 군인이 丙種. 落第 도장을 딱 찍어 줬다구요.
▣ 1989.2.11(토) 본부교회. 복귀와 해방.
- 부모님 탄신 경축예배.
187-217 그때 내가 이북에서 나올 때 머리를 깎고 나왔어요. 머리를 깎고 나왔으니까…. 옛날에는 군대에 가면 머리를 깎았다구요.
요즘에도 머리 깎나요? 머리 깎은 사람이 나오니까 나와 가지고 …, 나도 이남에 나왔으니까, 젊은 사람이니까 군대를 가야지요.
나와서 서울 들어오는데 창경원이 있다구요. 거기에 젊은 군인들이 있어요. 그게 해병대 같아요. 지금 알고 보니까.
젊은 놈이 오는 사람들을 갈라 세워요.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조그마한 녀석은 "이리 가라" 하고 말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저리 가라"하고.
나는 감옥에서 갓 나왔지만 이렇게 뚱뚱하고 그래도 말라갱이 같지 않거든. 요즘 말로 하면 스루메인가? 스루메スルメ를 뭐라고 그런던가? 오징어.
이래 가지고 병역 조사를 했는데 말이에요. 머리를 깎았다고 "어디서 왔소?"하는 거예요. 머리를 깎았으면 군대에 있다 나왔을 텐데 말이에요. 군대의 도망병이 아니면 …. 그래서 의심하는 거예요.
"어디소 왔소? 도망병 아니야?" 해요. 요즘에야 도망병이란 걸 알지 그때야 알게 뭐예요.
"어디서 오긴 어디서 와. 이북에서 왔지" 하니까, "이북?" 하는 거예요. 머리를 깎았으니 간첩…, 그때는 한창 피난 갈 때 간첩인지 군인인지 막 섞여 다녀도 모르거든. "간첩 아니냐" 하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 간첩을 집어넣으면 자기 모가지 달아나겠거든. 그러니까 조사하고 나서 뭐냐 하면 丙種이에요. 落第 도장을 딱 찍어 줬다구요. 그래서 그거 가지고 만사형통이지, 어디 가든지.
증명서는 그것밖에 없다구요. 감옥에 있다가 나온 사람에게 주민등록이 있겠어요? 어디 가서 조사하면 그걸 내주는 거예요. 그 표가 병종이지만 어디 가든 모든 것이 통과되더라구요.
그 후에 주민등록 해 가지고 살고 있다가 문제가 생겨 가지고 감옥에…. "아이구 병역 기피했네. 병종이래." 하며 별의별 것 얼마나 조사해 봤겠어요? 이거 걸기 위해서.
▶ 이불팔아 떡 해먹기 (경북 점촌 농가)
▣ 1967.2.14(화) 전본부교회. 전통과 세계복귀.
- 제48회 참부모님 탄신일.
158-054 그걸 볼 때 세상 부모에 대해서, 형님들에 대해서 면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로서 책임을 다했습니다. 나는 나로서 하늘이 나에게 맡긴 책임을 다했어요.
공적인 책임을 해결하기 전에 사넞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시일을 다 보냈기 때문에 사적인 문제를 해결 못 했더라도 공적인 기준 앞에 있어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인 문제는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향에 부모 형제…. 내가 이남 땅에 내려감으로 말미암아 북한이 어떻게 될 것이다, 앞으로 전망을 어느 정도까지 했기 때문에 삼팔선을 어떻게 넘어서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상당히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내가 고향을 떠나게 될 때 부모 형제 친척을 생각 안 했겠어요? 그래 가지고 이남에 나올 때까지 하늘이 역사를 많이 한 거예요.
임진간을 넘으면서 그때 삼판선의 분기점이 임진강이었거든요. 임진강을 어떻게 넘느냐 이거예요.
만일 그때 전부 내 말대로 안 했으면 못 나오는 거예요. 쉼 없이 앞길을 재촉하는데 나는 ….
그때 원필이지. 이 사람은 세상을 모르니까 그럴 거예요. 삼팔선에서 경비 경찰관들이 전부 다 후퇴니, 사태가 불리한 것이거든요
그럴 때는 재빨리 아주 먼저 뛰어야 된다 이거예요. 이래 가지고 여기 용매도를 통해서 이남 나갈 배를 탔다가 그때도 경찰관들이 전부 다 후퇴하는 바람에 뭐뭐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타겠어요?
그래 가지고 용매도 갔다가 배가 없어서 다시 나온 거예요. 다시 나와 가지고 삼팔선을 넘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를 겪으면서 나왔는데, 오늘 저녁 같이 저녁때가 됐는데 그 피난 나온 사람들이 걸어가다가 지친 거예요.
거기다가 독 같은 사람을 자전거에 다 태우고 밀고 나오려니 말이에요, 얼마나 힘들어요. 남들은 전부 자기가 업은 애기도 버리고 가는 판국인데 이 사람은 나보다 큰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다리가 부러져 자전거에 태워 가지고 끌고 나갔으니 얼마나 피곤했겠어요? 이렇게 되니까 피곤하기가 한이 없거든요. 이렇게 해 가지고 남한까지 내려오는데 그거 오죽하겠어요? 이렇게 되면 피곤하거든요.
그런데 저녁이 되니까 전부 다 동네방네 들어가 가지고 자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밤을 새워서라도 임진간을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예요.
이건 뭐 가자니까 얼마나 …. 남들은 다 들어가 자는데 선생님이 가지니까 "선생님 고집이 뭐 저래!" 이럴 거 아니에요? 시무룩해 가지고.
밤에 남들은 전부 다 자는데 우리 셋이서만 자전거를 끌고 임진강까지 왔다구요. 임진강 강가에 와서 잤습니다. 한 시 반인가 두 시쯤. 새로 두 시 그때에 도착했거든요.
그다음에 걱적이 뭐냐 하면 임진강을 건너가려면 물이 얼어야 할 텐데…. 그때 날씨가 추워져서 임진강이 얼어 버렸어요. 얼음이 얼어 가지고 가 보니까 강을 건너가 기다린 사람이 많더라 이거예요.
이래서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가지고 나섰던 거예요. 임진강이 얼어붙어서 결국 강을 건너갔는데 내가 맨 마지막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후부터는 커트예요. 커트해 가지고 전부 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남한 땅에 왔어요.
158-057 그래서 우리 한번 떡을 해 먹자 이랬어요. 자, 이제 이불 보따리는 전부 다 필요 없거든요. 1월이 되었기 때문에 필요 없다 이거예요.
그까짓 것 어디가서 밖에서 자더라도 옷만 입고 그냥 잘 수 있는 거예요.
이불 팔아서, 거 짐이거든요. 이불 팔아서 떡 해 먹자!
어떤 집에 들어가 보니 전부 다 피난 나간 것 같았어요. 들어가니까 할머니하고 아주머니 두 분이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인데 1월이 되었기 때문에 뭐 좀 춥더라도 그렇게 얼어 죽을 형편은 아니고 이게 짐이 되니 팔려고 합니다. 이거 이래도 솜도 좋고 이불도 괜찮은 겁니다. 새까맣기는 하지만 근본은 괜찮은 것이니까 쌀하고 바꿉시다" 하니까 쌀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벼하고 바꿉시다" 그래서 그때 벼 두 말하고 바꿨어요.
벌써 이렇게 한 것이 석 달 가까이 되잖아요. 석 달이 넘었거든요. 석 달 동안 피난생활하면서 이 솜바지 저고리 입고 나온 것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답겠나? 별수 없는 거예요.
▣ 1970.3.21(토) 구리 통일산업. 새로 출발하자.
- 제2회 협회간부 수련회
030-139 그날이 1월 하순으로 기억됩니다. 난리통에는 이불 보따리 필요 없었어요. 부산까지 가려면 이불 보따리가 짐이 되기 때문에 전부 팔아 가지고 벼 한 가마니하고 바꿨어요.
그때는 쌀이 어디 있어요? 쌀이 없으니까 벼와 바꾸어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발로 밟아 찧었던 것입니다.
그때 함께 내려온 사람들과 실컷 한번 먹어 보자 했지요. 그때는 먹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불이 없다고 해서 얼어죽지는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해 가지고 4일 동안 떡을 만들었어요. 그것이 소두 세 말이니까 대두로 한 말 반 정도 될 것입니다.
그걸 모두 떡을 해 가지고 셋이 앉아서 다 먹었어요. 한 그릇 정도 남겨서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주었어요. 하도 먹질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실컷 먹은 것입니다.
▶ 1951.1.18 영천에서 찢은 편지
▣ 1971.6.24(목) 전본부교회. 그리운 고향.
046-142 내가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도 어머니를 못 만나 봤습니다. 부모를 못 만나 봤어요. 평양에서 고향까지는 280리예요. 잠깐이면 갔다 올 수 있는 거라구요.
그런데 왜 못 갔는냐? 선생님과 신앙으로 인연되었던 사람들을 다 찾아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다 찾아보지 않으면 안 돼요.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나 그 사람들의 무덤까지 찾아가서 "너희들은 배반하고 떨어져 나갔지만 나는 배반하고 떨어지지 않는다" 고 해야 했습니다.
그들과 헤어질 때 약속을 했으면 나는 끝까지 그 약속을 세워 놓고 지키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정성껏 따르던 그런 사람들을 중심 삼고…,
여러분 내가 미국에 가면서 여러분에게 "1월 18일이 무슨 날인가를 기도해서 알아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거 생각나요? 그날이 무슨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이거예요.
그날이 선생님에게는 가장 슬펐던 날입니다. 돈이 없어 슬펐던 날이 아닙니다. 사람이 없어 슬펐던 날도 아닙니다. 선생님의 일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날이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정성을 들여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의 기도를 해 주고 그들과 약속을 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생님을 저버렸을지라도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다는 사실을 중심 삼고 萬丈의 편지 (아마 한 20장은 썼을 거예요.)를 써서 세 번씩이나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편지를 갖다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선생님은 되돌려받은 그 편지를 가지고 이북에서 나왔습니다.
경북 영천에 들어가 보면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에서 1월 18일에 그 편지를 읽으면서 찢어 버렸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모르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남한 땅에 내려와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길을 다시 가야 되었습니다. 그 영천이라는 말이 아주 재미있는 말이에요.
▣ 1992.6.3(수) 한남동. 전통 교육 실천을 통한 통반격파.
― 교구장, 연합회장.
231-234 지난번에 영주에 갔을 때 영천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습니다. 옛날에 영천으로 피난 가면서 거기서 내가 편지 하나를 찢었습니다.
그날이 1월 18일이었어요. 그걸 잊지 못해요.
거기에 열차가 건너가는 둑이 있었는데 그 둑에 앉아서 지난 날을 생각하며 편지를 찢으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
사람이 그런 무엇이 있어야 돼요. 말은 안 하지만 그 목표, 그 표제를 중심 삼고 원수를 내 손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그날을 위해서 밤이나 낮이나 투입해야 합니다.
▶ 미리 준비한 식사 환대 (경북 월성 건천)
▣ 1963.10.18(금) 광주교회. 통일교회의 길.
153-087 내가 맨 처음에 부산에 내려올 때 피난민으로서 피난 보따리를 지고 괴나리봇짐을 지고 평양에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함흥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데에 한 57일이 걸렸어요. 이래 가지고 밥도 얻어 먹고 그러면서 다니는데 말이지요, 재미있는 것이 하늘은 참 잘 알더라구요.
배가 고프고 정 지치게 된다면 쓱을 벌써 알거든요. "아무 날, 내일 모레쯤 닭이 생길 것이다." 생각하게 되면 어느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오셨습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래 "누구세요? 난 모르는데요" 하면 "아닌 게 아니라 간밤에 우리 몇 대조 할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닭 잡고 떡 해 놓으라고 해서 떡을 해 놓았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물으니 "보기에 초라한 행인으로 온다 했는데 보니까 선생님의 얼굴과 흡사하다" 하는 거예요.
그거 믿어져요, 여러분들? 그래 가지고 떡도 얻어 먹고 닭도 얻어 먹고 그런 일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 1970.3.21(토) 구리 통일산업. 새로 출발하자.
- 제2회 협회간부 수련회
030-139 그런 가운데서도 정 어렵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먹을 것을 준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낯모르는 아주머니가 집에서 나오더니 귀한 손님이라며 인사를 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면 "꿈에 귀한 손님이 오니까 모시라"고 했다는 거예요.
벌써 영계에서 그 사람을 통해서 협조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는 거예요. 선생님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참 많아요. 많다는 것입니다.
▣ 1992.8.2(일) 영등포 교회. 사랑은 만국의 행복의 터전.
- 서울 남부지역 지도자.
234-023 선생님이 이 길을 닦아 나오는 데 있어서도 하늘이 전부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살이 나올 때 저녁밥을 못 먹게 되면 벌써 누군가가 저녁밥을 해 놓고 길가에 나와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내가 지나가면 "아무 선생님 되시죠?"하고 인사를 해요. 그래서 "누구냐?"고 물어보면 "어젯밤에 자기 조상이 나타나 가지고 이 앞에 이런 분이 지나갈 텐데 반드시 저녁밥을 대접하고 잘 모셔라!"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참 많다구요. 그거 꿈같은 얘기지요. 그런 일이 통일교회에는 참 많아요. 그런 체험을 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지켜 준다구요. 그렇잖아요.
▶ 내가 이남 땅에 와서 내 앞에서 노래할 사람이 누구냐?
▣ 1967.2.14(화) 전본부교회. 전통과 세계복귀.
- 제48회 참부모님 탄신일.
158-057 그다음에는 내가 이남 땅에 와서 내 앞에서 노래할 사람이 누구냐? 이런 것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경주에 와서 말이에요, 머슴아가 나오더니 그 녀석이 공장에 있는 녀석인데 그놈의 머슴아가…, "노래 한번 하라" 그랬더니, "이남 땅에서 노래 처음 듣게 노래 한번 하라"고 그랬더니 그 노래하던 생각이 나요.
첫 번째 들은 노래가 뭣이냐 하면 말이에요, 한번 할까요? 여러분이 좋아할까 봐서 싫어요.
▶ 1951.1.27 경남 울산역. 화차에 편승하여 부산까지
▣ 1967.2.14(화) 전본부교회. 전통과 세계복귀.
- 제48회 참부모님 탄신일.
158-057 부산에 가는 데는 차길(찻길의 북한어)이 있지요. 거기서는 이제 차가 멎는 정거장이 경주에 있다는 거예요.
그때 경주까지 한 두어 정거장 남았다고 해서 "걷자" 해 가지고 그다음엔 별것 없는 거예요. 뭐 기관차고 객차고 짐차고 뭐 타고 보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짐차가 있더라 이거예요. 타는 거예요.
타는 데는 어디에 타느냐? 맨 앞 대가리에 가서 타는 거예요. 앞 대가리 가서 운전수하고 싸움을 하게 되면 밀려 나더라도 뒷간에는 타는 거예요.
"자, 신세를 안 질 테니까, 짐 실을 때는 내가 필요할 테니까 기관수 옆에 좀 태워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떼거리를 쓰는 거예요.
그다음엔 차 맨 밤바가 있거든요. 기관차. 거기에 올라가 앉는 거라구요.
▶ 1951.1.27 부산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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