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장춘(禹長春, 1898년 4월 8일 ~ 1959년 8월 10일 부산)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한국의 원예 육종 학자이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아버지의 오류가 한평생 짐이 되었으나 한국의 식물학과 농학을 이끌었다. 부산광역시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살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조선인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ナカ)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의 원한을 갚고자 했던 고영근에 의해 그의 아버지 우범선이 살해됐고 과부가 된 그의 일본인 어머니는 우장춘을 사찰에 맡겼다.
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조선에서 훈련대 대장을 역임하던 중 일본인 자객들과 함께 공모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했으며 그 이후 일본으로 도망쳤다.
우범선이 죽은 후에도 일본 정부는 우장춘과 그의 가족에게 생활비 및 학비를 지원했다.
어머니 사카이 나카는 청소, 빨래 등의 노동을 해서 버는 돈으로 우장춘과 그의 동생을 가르쳤다.
1916년 4월 동경제국대학 (2007년 11월 발표된 영국 타임스지 고등교육 부록(THES)에 따르면 도쿄대학은 세계 20위로 선정되었다.) 농학실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 고원(雇員)으로 취직했고 그를 아꼈던 데라오 박사의 도움으로 농사 시험장 기수(技手)가 됐다.
1936년 5월 4일에는 그의 모교에서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창설한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에게 연구소의 운영을 부탁했고 그는 1950년 3월 8일 대한민국에 귀국했다.
우장춘은 일본인 부인과 자녀들을 일본에 남겨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전혀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을 믿지 못했고 그의 출국을 금지했다.
모친상 때 그에게 일본 방문이 허락됐고 모친상이 끝난 후에 그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있으며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다
-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강원도 감자를 개량했다
- 코스모스를 길거리를 아름답게 하는 꽃으로 권했다
-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했다
- 제주도 환경에 적합한 감귤 재배를 권했다
-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 수 있도록 겹꽃 개량종을 개발했다
- 종의 합성 이론을 제창하여 진화론의 새 지평을 이루었으며, 이 내용은 현대 유전학 교과서에서도 중요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 유채를 일본으로부터 도입하여 제주도에서 재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 오해
-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든 농학자로 흔히 알려졌으나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은 교토대학교의 기하라 히토시(木原均) 박사이다.
- 우장춘 박사는 육종학과 농업 신기술의 중요성을 국내에 알리기 위해서 씨 없는 수박 종자를 직접 재배하여 보여 주었을 뿐이다
- 우장춘 박사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장인이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것은 커밍스의 한국인 아내(1959년생)의 성이 동일했기 때문에 와전된 것이다.
- 일본 교세라(京セラ)의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는 우장춘의 4녀 아사코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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