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

丹心歌 - 鄭夢周

true2020 2010. 12. 9. 14:51

丹心歌 - 鄭夢周 (1597~1673 호는 圃隱)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해동악부와 포은집에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寧有改理也歟'로 한역되어 있다.

지은이 정 몽주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고려말의 국운을 한 몸에 지고 버티던 충신으로, 그의 죽음은 고려의 멸망과 때를 같이 한 절개의 표본이었다.

그는 1360(공민왕 9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 수찬(修撰)을 거쳐 성균 대사성 대제학을 지내면서 문신으로서는 국가 최고 중추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겸직으로 낭장 겸 합문지후(郎將兼閤門祗侯) 위위시승(衛慰侍丞) 등을 역임하면서 1363(공민왕 12년)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의 토벌에 참가하였고, 1380년(우왕 6년)엔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 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도 참가 하였다.

그는 정치, 군사, 외교에도 밝아 明나라와 일본에도 다녀왔다. 그러기에 이 성계의 세력이 커져 조준, 정 도전 등이 이 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끝내는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피살되었다.

이와 같은 경력을 지닌 그가 한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도리의 신봉자란 점을 감안할 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다시 고쳐 죽어 뼈가 티끌이 되어 넋이야 있든 없든 간에 임(우왕)을 향한 한 가닥 충성심이야 변할 수 있겠느냐고 방원의 何如歌에 대답해 준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마음을 자기 쪽으로 옮겨 앉게 하려는 방원의 그늘진 제청을 보기 좋게 거절하는 부동의 결의를 나타낸 시조이다.

세상에서는 이 시조를 태종의 '何如歌'에 짝지어 '丹心歌'라고 부르고 있음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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