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李芳遠 1376~1422) 이조 3대 왕, 태종(太宗)으로 태조의 5남.
만수산(萬壽山) : 개성 서문 밖에 있는 산 드렁칡 : 칡덩굴
해동악부(海東樂府)와 포은집(圃隱集)에는 '如此赤何如 如彼赤何如 武輩若此爲 石死赤何如'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태종(太宗)이 정 몽주에게 절개를 굽혀 같은 무리에 들어올 것을 넌지시 떠본 시조이다. 이를 가리켜 '하여가(何如歌)'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절개를 굽히면 어떻고 안 굽히면 또 어떠냐는 식의 회유다.
개성(開城) 서문 밖을 가로막고 선 만수산에 칡덩굴이 얽혀 험한들 무슨 일이 있을까 보냐, 우리도 이같이 얽히고 얽혀서 몇 백 년이라도 권세를 누려보자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절개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정몽주의 군신론(君臣論)을 지칭하고 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조(李朝)를 창건한 이 태조는 봉건시대의 모든 혁명이 그러했듯이 일종의 역성혁명(易性革命)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더구나 정몽주와 같은 대학자(大學者)로서는 고려조(高麗朝)의 한 무관(武官)에 지나지 않았던 사람을 왕으로 섬기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힘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왕권을 잡은 권력에 아랑곳없는 정몽주는 한편으로 다시없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왕의 덕(德)과 인(仁)을 백성에게 보여 줌으로써 민심을 수습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고 보면 정몽주의 가담(加擔)이야말로 그것을 수습하는 열쇠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방원으로서는 머리를 숙여서까지 그를 끌어들일 수는 없는 군주(君主)의 입장이고 보니 고두백배(叩頭百拜) 모셔 올 수는 없었다. 신하의 길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정 몽주의 군신론에 망설임과 재고(再考)를 촉구하는 암시나 해 볼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었다.
그러기에 넌지시 만수산에 칡덩굴이 우거져 왕조의 갈길이 험한들 뭐 두려울 게 있겠느냐고 허세를 부려 정몽주의 전향(轉向)을 권고해 보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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