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정성 신앙 회개

신앙자의 자세. ▣ 1971.4.25(일) 전본부교회.

true2020 2023. 1. 17. 14:03

▣ 1971.4.25(일) 신앙자의 자세. 전본부교회. 

043-094 인간들은 잃어버린 소망의 세계를 다시 찾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류 시조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타락한 그날부터 인류는 슬픔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 절망 가운데 빠져 슬픔을 절실히 느끼는 사람이 그 절망을 박차고 나오면 새로운 소망의 기운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슬픔의 경지에서 소망의 경지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우리 인간인 것을 생각할 때 그 슬픔이라는 것이 자기 개체에게만 해당되는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슬픔은 나를 넘어서 사랑하는 아내면 아내 자녀면 자녀 즉 가정을 중심 삼고 관계되어 있고 또 자기의 친척 혹은 민족 국가 세계가 관계되어 있으면 더 나아가 지금까지의 전 역사도 이 슬픔 가운데서 이어져 내려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슬픔은 내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슬픔의 뿌리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온 역사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내가 당하는 슬픔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내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슬픈 환경을 박차고 나서지 않고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세계, 기쁨의 천국은 오지 않는다.

▶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중심자 즉 어떤 실체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043-095 그러면 이 슬픔의 근원은 어디냐? 즉 슬픔의 뿌리가 무엇이냐? 이 슬픔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연결되는 것이요, 이 슬픔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자포자기의 자리, 혹은 패배의 서러운 자리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활하는 주변에서 기쁜 일을 보는 것보다도 너무나 많은 슬픈 사실들을 보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환경을 박차고 나서지 않고는 우리가 소망하는 기쁨의 세계, 기쁨의 천국은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의 세계와 기쁨의 천국까지 가려고 할 때에 내 자체의 힘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 슬픈 자리도 벗어날 수 없는 내 자체의 힘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서 신앙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느낌에 비례하여 당하는 슬픔을 타개하고 제거시키고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힘의 모체가 필요합니다.

 

슬픔의 경지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 자신이 그 슬픔을 타파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자신임을 알게 될 때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중심자 즉 어떤 실체를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요건을 찾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신앙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하는 사람은 슬픈 자리에 동조하여 끌려갈 것이 아니라 슬픈 자리가 되지 않게 방비하고 슬픈 요인을 제거시키고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생활환경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라야 신앙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악이 뒤넘이치는 가운데서 악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슬픔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요. 선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043-097 또 여기에는 하나님과 반대되는 사탄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활권 내에는 선과 악이 뒤넘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선악이 뒤넘이치는 가운데서 악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슬픔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요. 선한 입장에 서게 될 때에는 기쁨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탄 편에 처하게 될 때에는 여기에 슬픔이 가중되는 것이요, 하나님 편에 처하게 될 때에는 기쁨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신앙자가 하나님을 중심 삼고 선을 위주로 하여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절대적인 행복을 제시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 슬픔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모색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선을 중심 삼고, 하나님을 중심 삼고 출발하게 될 때에 출발하는 입장에 선 자신의 과거와 오늘이 얼마만큼 차이가 있느냐 하는 그 비례에 따라 자신이 전진할 수 있느냐, 후퇴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도 오늘이 더 발전될 수 있는 내용을 겸비하게 될 때에는 선한 자리로 한 걸음 전진할 것이요, 어제보다도 하나님 앞으로 가일보 전진할 것이로되 어제보다도 오늘이 침체되게 될 때에는 선 앞에 있어서 반대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043-099 내가 하는 한마디의 말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혹은 하나의 행동이 선을 결정하느냐, 악을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나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 즉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느냐, 슬픔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 슬픔과 기쁨은 나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대한 우주, 방대한 세계, 방대한 역사와 더불어 관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신앙자의 입장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 우리가 신앙자로서 가는 길에 있어서는 한마디의 말도 함부로 할 수 없고 하나의 행동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한 가지의 생각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말 한마디를 잘못하면 그 말로 인해 악이 자기를 시인할 수 있는 절대적 조건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말 한마디가 평상시에는 아무런 내용을 갖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 또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표정이지만 그 표정을 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여러분의 한마디가 그런 기원이 되고 엄청난 악의 출발의 조성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의 표정 하나가 사망 세계를 결정할 수 있게 하고 사탄의 완전한 무대가 출발할 수 있는 하나의 표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항시 생각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선악은 일생 노정을 중심 삼아 가지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우왕좌왕하면서 한 발을 내딛게 될 때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여러분 신앙자의 입장은 저울눈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저울눈을 맞추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눈금이 조금만 틀리게 되면 저울대가 반대로 왔다 갔다 합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오늘날의 신앙자의 입장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표정이 선의 길을 대신하고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거예요. 

 

▶ 자신이 선한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현재 내 생명의 터전을 남기기 위해 무수한 수난의 피의 대가를 치른 결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 

 

043-101 오늘의 나는 과거를 돌아볼 때에 타락의 후예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현재를 볼 때에 자신이 선한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과거의 선조의 공적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현재 내 생명의 터전을 남기기 위해 무수한 수난의 피의 대가를 치른 결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 여러분이 모르는 가운데 여러분이 살고 있다는 신념을 갖기 전에 그 신념을 찾고 느낄 수 있는 여러분 자신의 밑바닥에서는 사망이냐 생명이냐 하는 문제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싸움터를 중심 삼고 사망선을 방어하고 사망선을 뛰어넘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그러한 터전이 없게 될 때는 까딱 잘못하면 사망권의 침범이 시작될 것입니다.   

 

043-103 악이 얼마나 악한가와 그 악의 흉계를 알고 악이 그 범위를 얼마나 크게 하고 있느냐, 범위가 얼마나 넓으냐 하는 것을 측정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악이 선을 대하여 공격하던 그 이상의 힘을 모으고 그 이상의 공격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 또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를 악에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악과 더불어 본질적으로 화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의하지 않고 언제나 분별하지 않고 언제나 선 앞에 기준을 맞추지 않고 가다 보면 악으로 돌아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행로는 그 기원에서 이탈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의 기원을 가진 우리의 습관적인 행로의 결과는 반드시 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043-108 신앙길이라는 것은 영원한 목적을 표준해 가기 때문에 그 목적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가야 하는 겁니다. 침묵이 선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복귀 섭리를 누구한테 선포하시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도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는 가운데 역사는 그 한계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043-113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침묵의 기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무아의 수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열 번 이상을 생각합니다. 그런 자리로 자기를 몰아넣었습니다. 

 

* 자기의 신앙생활에 동정을 남기고 가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 나는 거예요. 지금 선생님 자신도 그렇습니다. 

 

043-115 우리 앞에 누가 있느냐? 사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 한마디하게 될 때에도 반드시 그 말을 걸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서 "넌 내 것이다" 하고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을 변호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면 "당신은 하나님 것이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어요? 끝내는 변호사와 검사의 싸움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엄연한 하늘의 공의의 법도로 치리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어서 공판정에 선 죄수와 같은 입장입니다. 전부 다 그렇다는 거예요.  

 

▶ 현재 자신의 생활에서부터 자신에서부터 사탄이 틈타지 않게 해야 되고 사탄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없애야 된다. 

 

043-121 여러분은 현재 자신의 생활에서부터 자신에서부터 사탄이 틈타지 않게 해야 되고 사탄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없애야 됩니다. 그러한 자신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거기까지 가야 할 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정을 받고 그것을 확대시키기 위한 격정의 동상에서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내가 지고 피해를 내가 입겠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죽음의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쓰러질 수 있는 생애의 종착점은 어디냐? 

 

043-125 사탄은 뭐냐? 악이라는 것은 자꾸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 대신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악입니다. 자꾸만 높아지려는 것이 사탄의 본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본질적인 조상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그런 녀석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높여 주라는 거예요. 얼마만큼 높여 주느냐? 하나님 이상 높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을 하나님 이상 사랑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