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12.10(일) 전본부교회. 승패는 순간에 결정된다.
019-025 아무리 큰 나라도 망하는 것은 순간에 결정된다. 오랜 역사를 지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간을 잘 보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고 먹는 생활의 한순간에 역사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날 한순간의 실수로 인하여 일생 동안 쌓은 실적을 모두 무너뜨릴 수도 있다.
한순간으로 말미암아 전 생애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성공한 자리에서는 모든 사람이 찬양하지만 실패하게 되면 정반대가 된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지만 내쉬었던 숨을 들이쉬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마지막 한 순간의 숨이 생애를 결정한다.
어떤 한 순간의 결정이 없이는 빌딩을 세울 수 없는 것처럼 탕감복귀가 완료되는 것도 한순간에 의해 결정된다.
산을 볼 때에는 그 산의 분수령을 생각하게 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 하나가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
똑같이 떨어진 물방울도 그 떨어지는 방향에 따라서 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올바른 쪽으로 떨어지도록 작용해 주는 것이 선생님의 사명이다. 조그만 힘이라도 선생님이 가했다는 것이 없이는 탕감복귀가 안 된다.
통일교인은 산상의 분수령에 올라 앉아 있는 입장이다. 여기서 한순간 잘못하면 천추만대의 후손들까지 다 잘못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밧줄에 팔다리를 꽉 묶어야 되는데 손가락만 걸고는 "끌어올려 주십시오" 하는 입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밧줄을 끌어 올리신다. 그러니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가! 하나님께서 밧줄을 끌어 올리시는 힘보다도 내가 밧줄을 붙잡는 힘이 더 세야 한다. 우리가 틀림없을 정도로 꽉 잡으면 하나님은 일시에 끌어올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수없이 많은 밧줄을 내리시는가? 역사 이래 그 줄을 꽉 잡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그 일을 되풀이하시는 것이다.
사탄이 내린 썩은 밧줄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붙잡고는 뒹굴며 좋아한다.
여러분의 마음을 필름에 찍어서 그 사진을 자신이 본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밧줄을 잡는데 있어 눈은 다른 곳을 쳐다보고 손으로만 잡고 있다. 그것도 힘껏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생각하며 건성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걸어야 하는 심각한 것이다.
태초에 인간 조상이 타락했으니 그 후손된 인간들도 타락할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상의 심각한 자리에 서지 않고는 복귀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로 너로구나" 하실 수 있는 심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개인만으로는 안 된다. 부부가 있어야 된다. 과연 그런 부부가 있는가? 또 그러한 가정이 있어야 하며 그러한 종족이 있어야 한다.
최고로 심각한 자리에 설 수 있는 종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이 땅에는 수많은 종족이 있다. 그 중에서 하나님만큼 심각한 종족이 있어야 한다.
019-027 삼천만 민족을 안고 모든 사탄을 물리치겠다는 각오로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느냐?
개인보다도 가정, 가정보다도 종족, 종족보다도 민족, 민족보다도 세계 전체를 복귀해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심각하시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은 그림자 즉 허풍선에 지나지 않는다.
* 일본의 청년들 중에는 뜻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이 뜻을 몰랐다면 죽을 수 없었을 것이다. 뜻을 이룸으로써 그들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집은 아무것도 아니다. 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웃을 수고 있고 울 수도 있는 그런 사람, 그런 가정이 문제인 것이다.
전체 역사를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자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내 모습은 비록 처라하지만 내가 한번 웃을 때는 만국이 웃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하를 통일한 어떤 영웅보다도 위대한 사람이다.
복귀섭리로 보아 이것이 마지막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순간순간을 심각히 여기는 자신이 되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 휩쓸려 다니는 자세로는 안 된다.
한번도 심각한 자리에 서지 못하고, 한순간도 심각한 순간을 갖지 못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사람이다. 그러한 순간이 문제이다.
자기를 놓고 세상이 종하는 비울과 세상이 싫어하는 비율 중 어느 쪽이 더 큰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천지 공법을 잘 지키고 천지가 공인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살 수 있는가?
죽음에 임박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느냐고 자문했을 때 생애를 통해서 선하게 살았다는 마음이 60%를 넘지 않으면 지옥행이다.
몸은 제한을 받더라도 마음은 제한받지 않으려는 투쟁의 역사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늘과 땅, 역사와 현실 그리고 후손을 대해서도 "나는 해방이 되었노라 그러니 나의 전통을 이어받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순간을 갖지 못했다면 그는 용서 없이 지옥행이다.
* 탕감복귀노정을 걸어가는 사람은 한순간도 마음놓을 수 없고 잠을 편히 잘 수 없다. 길을 가더라도 밥을 먹더라도 바쁜 것이다.
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온 힘을 모아 정성 들여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선생님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양단 치마를 입고 노래를 부르며 앉아 있는 사람보다 정성을 들이는 사람을 더 원하신다.
담요를 걸쳤으면 어떻고 무릎이 보이면 어떠한가. 그의 정성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 그리워서 하나님께 기도한 적도 많다.
* 이 길을 가다가 못 간 사람을 불러 놓고 물어보면 그들에게도 변명할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제2의 천국을 만들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갈 것인가? 통일교회를 떠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도 시간은 째깍째깍 가고 있다. 그 어떠한 경우보다 초조하다.
여러분들은 선생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이곳에 모인 것이 아니다. 얼굴은 여러분과 다를 바 없다. 다만 하나님의 한을 알았으니 그 한을 풀어 드리고 또한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것이다.
전도를 할 때 생사를 結하는 판가리 싸움을 한다는 심각한 마음을 가지고 해 보라. 생사의 판가리는 순간이 중요하다.
순간 순간의 신앙이 모여서 하루의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019-029 선생님은 동 서양의 밤과 낮 시간이 다른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모두 같은 시간에 잠을 자 버리면 사탄이 점령해 버릴까봐 자는 사람이 마음 놓고 자도록 하나님은 동반구와 서반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루는 86,400초다. 이 시간 모두를 뜻을 지키고 세우는 데 동원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 있는가?
단 1초라도 "내가 참여하겠다"고 생각하라. 1초씩 맡겠다고 나설 수 있는 86400가정이 있을 것 같은가? 종족 가운데 그런 종족이 있을 것 같은가? 어림도 없다.
* 선생님이 어느 누구만 못해서 이 일을 하고 있겠는가?
주님이 오기 전부터 맞을 준비를 하고 수고해야 한다.
지나고 나서 후회해도 소용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고행해 왔다. 그리고 몰려 나왔다. 거짓된 뜻을 가지고 몰린다 해도 친구가 생기고 동료가 생기는데 하나님을 뜻을 가지고 끝까지 몰린다면 동조자가 생기지 않겠는가? 만약 안 생기면 하나님이 행차하시고 천군천사가 우리와 한 무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재산과 은혜를 통일교회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공세를 취하려고 한다. 이 싸움에서 선생님이 진다면 통일교회를 반대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이 좋아할지 모르지만 선생님이 승리한다면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때 우리는 그들의 복을 빌어 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선생님 나이도 50에 가까와졌다. 그동안 무엇을 했나 하고 생각해 보면 통일교회 식구들 고생시킨 것밖에는 없다.
선생님도 고생했지만 식구들도 많이 고생했다. 그 고생한 모든 것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고생을 시킨 사람이 망하면 몰라도 승리하게 되면 결과는 달라진다.
여러분을 때려 몰아서라도 이 민족을 살려야 한다.
여러분이 수고를 했으면 얼마나 했는가. 그 정도도 못한다면 안 된다.
우리의 고생을 세상에서 알아 주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이 배후에서 얼마나 많이 역사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지난 날을 회고해 보면 잘먹고 잘자고 했던 것은 하나도 안 남는다. 추운 자리에서 신문 한 장, 가마니 한 장을 덮고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눈물짓던 것이 남게 되는 것이다. 자기에게 재산될 것은 그것밖에 없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없으면 저나라에 가서 내놓을 것이 없다. 내놓을 것을 쌓아 두려면 고생을 해야 되는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차를 다고 가다가 한강을 바라보게 되면 옛날에 선생님이 큰 뜻을 품고 일본을 향하여 가기 전에 한강을 바라보면서 비장한 각오를 하던 것과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갈 때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장한 결의를 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을 때 동정하며 오바를 덮어 주던 일본 부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또한 형무소에 있을 때 찾아와 주고 편지 한 장 써서 보내 주었던 사람을 선생님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진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어떠한 문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정한 동정에 있다.
결국 남는 것은 공적인 고생이다. 이런 고생을 하고 영계에 갔는데 거기서 망하거든 선생님께 항의하라.
민족과 세계 하늘땅을 걸어 놓고 공적으로 맞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루 86400초 가운데 일 초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긴장하여 심각하게 삶으로써 하늘땅을 자극시키고 순간순간을 살려서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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