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노정

함경남도 함흥 김일성 주석과 단독 면담. 1991.12.8.

true2020 2016. 9. 14. 14:12

* 1991.12.5  46년 만에 환고향

* 1991.12.6 김일성 주석과 단독회담. 함경남도 김일성 주석 공관.

 

▣ 1992.12.9(수) 한남동. 참부모님 승리 귀국 환영 집회.  

239-334 그래도 고마운 것이 김일성이 선생님의 생가를 자기의 생가처럼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거 자기의 마음이 아니에요. 자기의 마음이 아니니까 선생님의 생가로 가는 길을 버스가 왕래할 수 있도록 닦고, 단장하고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있을 때도 성지화를 실천하라고 직접 명령했다구요. 그렇지? 윤기복과 김달현한테 선생님의 생가를 성지로 만들어서 앞으로 통일교회 사람들이 올 수 있게끔 준비를 잘 하라고 내 앞에서 명령하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 하는 겁니다.

 

나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도 한번 그렇게 해 봤으면 좋겠다구요. 박보희부터, 곽정환부터 그렇게 하라구!

 

* 그러니까 북한하고 하나 되어서 북한의 좋은 제도는 남한에 갖다 씌어 가지고 훈련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사탄이 북한에 훈련을 잘 시켜 놓았더라고요.

 

끝날이 되면, 진짜 판가리할 것을 알기 때문에 죽더라도 한이 없게끔 그것을 대신해 보는 거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원하는 것을 악마는 파괴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1992.7.7(화)  부산 사직체육관.  참부모님의 재현과 이상가정.

- 세계평화여성연합 대회.

 

234-258 작년 11월 30일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일 등도 모두 천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그동안 남북통일을 위한 본인의 정성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내용입니다.

 

남북통일은 가시적인 남북한만의 통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섭리적인 통일입니다. 남북통일은 본인이 기반을 통하지 않고는 성사되지 않습니다.

 

섭리가 요구하는 남북통일은 통일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통일의 기반 위에 영원한 자유와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이상을 꽃피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에 의한 통일이나 상대를 불안하게 하는 통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를 위하여 베풀고 또 베풀어 주는 참사랑에 의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1991.12.29(일) 벨베디아. 역사적 빚과 자아 해방.

224-338 이번에 내가 평양 가서 놀란 것이 뭐냐? 책을 200권 이상 읽었다는 거예요. 2백 권 이상. 뭐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보다 나아요 못해요?

 

이래 가지고 "아, 이것밖에 없다!" 하게 될 때 그거 누구 말 듣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들이 우리 부모님 묘를 만들고 묘비를 세우고 자동차 길을 닦고 야단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미국 CIA가 통일교회 원리를 공부하나? 내가 소련에 들렀을 때 소련은 벌써 8년 전부터 레버런 문 사상을 연구해 가지고 결론을 내렸다고 나한테 보고하더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KGB가 결론 내려서 레버런 문을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뭐예요? 지금까지 반대 아니에요? 얼마나 어리석어요. 그러니까 할 수 없다구요.

 

 

▣ 1992.11.23(월) 천운을 이끌어 가는 사람. 국제연수원.

- 세계일보 조사위원.

 

239042 김일성이 3만 쌍 합동결혼식을 진짜 하느냐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3만 쌍을 어떻게 결혼시키느냐는 겁니다. "3만 쌍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3만 쌍 결혼식을 했으면 그 사진을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안다구요. 

 

이번에 그 사진을 가지고 가서 김정일과 김일성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에 안기부 요원이 있으면 가서 다 보고하라구요. 3만 쌍 결혼사진이 청와대에는 없지만 김일성 김정일의 방에는 붙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라 이거예요. 그런가 안 그런가 알아보라구요.  

 

* 김일성이 배포도 크지만 사나이로서 됐더라구요.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까딱 잘못하면 들어 먹히겠어요. 내가 그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배포가 크다고 하는데 그 녀석도 괜찮더라구요. 

 

그 녀석을 구슬려 가지고 삼팔선을 열어야 하는데 그 무기가 뭐냐? 합동결혼식이라는 것을 딱 잡았어요.

 

김일성이 나하고 의형제를 맺었다구요. 그래서 내가 "일성이 형!" 합니다. 거짓말인가 물어보라구요. 세 번씩이나 다짐했어요. 

 

식당에서부터 송별하는 광장까지 150미터가 되는데 거기까지 손을 잡고 나오면서 "형님, 동생을 무시하면 안 돼요." 하니까 "아이쿠! 나도 그만한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사람이오. 뭘 원하는지 한 번 해 보소!" 그러더라구요. 

 

그러면서 손목을 잡고 나오니 따라다니는 사람이 자기 주석의 손만 건드리게 되면 무슨 사고가 생긴다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뒤에서 이상한 눈으로 보면서 따라오더라구요. 

 

그래서 "이놈의 새끼들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래? 내가 공산당을 누구보다 잘 아는데 이거 도수가 지나치잖아, 아 지삭들아?" 하고 한소리를 지르려다가 그만두었다구요.

 

그렇게 손을 붙들고 나왔어요. 그게 역사의 기록입니다. 

 

* 3만 쌍 합동결혼식을 재료로 해 가지고 내가  "일성이 형님, 3만 쌍을 데리고 북한에 들어갈 텐데 삼팔선을 열 자신이 있소?" 하니까 "있고 말구. 있고 말구. 야, 그거 멋지다!" 했습니다. 이건 역사적 비화입니다. 누구도 모르는 것을 여러분에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을 성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 김일성이 3만 쌍을 데리고 북한에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호텔이 없잖소?" 하니까 "송도 해수욕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그 솔밭에 수십만이 들어갈 수 있소. 그러니 10명 당 텐트 하나씩만 가져오면 만사가 해결이오" 하더라구요. 그거 맞는 말입니다. 그곳으로 먹을 것을 나르라는 것입니다. 원산항을 열 테니까 배로 전부 실어 나르라는 것입니다.

 

이게 거짓말이 아닙니다. 공문이 있다구요.

 

▣ 1994.3.13(일) 참사랑은 신인세계 완성의 꽃. 본부교회.

256-215 "형님으로 알고 찾아왔습니다. 나는 동생의 자리니까 동생은 형님보다 힘이 세고 다 그러니까 내가 모시고 다니겠습니다." 그래 놓고 김일성을 끌고 다니는 거예요.

 

말이 되거든. 내가 걷는 것도 빨리 걸으니까 끌려가야지 별 수 있어요? 손을 꽉 쥐고 말이에요. 내 손 힘이 세다구요. 작지만 말이에요, 운동한 사람이라구요.

 

김일성은 언제든지 손을 뒤로 빼고 사진을 찍었다구요. "이거 왜 이래? 형제가 손을 잡고 있는데 그게 뭐야?"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놔두라구요. 역사에 그런 사진은 처음 찍었을 거라구요.

 

이러니 경호원들이 눈이 시퍼래 가지고 노려보고 있더라구요. 김일성 몸뚱이에 손을 대면 총살입니다. 이거 끌고 다니는 것을 가만 보니까 말이에요, 수령이 명령한 원칙과 다르니까 표정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심일성이 눈짓을 하더라구요. 그러면 그렇지, 이젠 됐다 생각하고 막 끌고 다닌 것입니다.

 

그걸 운동권 학생들이 봤으니 "친구 중에 저런 친구가 어디 있을꼬? 얼마나 가까우면 저렇게 끌고 다녀도 우리 수령이 저럴꼬?" 하고 녹아 나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김일성 자신이 직고하는 말이 세상에 내가 많은 난다 긴다 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문 총재라는 사람은 한 번 만났는데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한 겁니다. 그거 잘된 거예요 못 된 거예요?

 

왜 잊을 수 없어요? 내가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장사하기 위해서 간 게 아닙니다. 살려 주기 위해서 갔어요. 탕자가 망하게 된 것을 부모의 자리에서 살려 주기 위해서 갔어요.

 

그러니 말은 안 해도 마음은 알아요. 부하들이 "그 사람들은 우리의 원수 중의 원수인데 수령님,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반대하는데 "그럴 수 없지만 나는 사람 볼 줄 아는 사람이야. 40년 동안 왕좌에서 이 놀음을 한 것도 사람을 볼 줄 알았기 때문에 해먹은 거야. 세상이 믿지 못해도 나 김일성은 문 총재를 믿어." 하더라는 거예요. 이거 참 멋진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자끼리 만나게 되면 내 얘기밖에 없어요. "야, 그 양반 지금 뭐하고 있는지. 또 오면 좋겠는데." 한다는 거예요.

 

또 이런 말도 했다는 겁니다. 김정일이 "아버지, 그럼 나는 문 총재와 남북통일해야 되겠소." 하니까 "그래야지!" 그랬다는 거예요. 이건 비밀 이야기입니다.

 

◑ 참어머님 자서전 226 목숨을 담보로 찾아간 곳.

227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우리 부부는 1991년이 가기 전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228 1991년 11월 중순에 김일성 주석이 우리 부부를 초청했습니다. 꽁꽁 봉해진 초청장을 미국에서 비밀리에 받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나는 겨울옷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 있는 수련소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하와이는 지금 여름인데 왜 겨울옷을 가져가실까?"

 

우리 부부는 수련소 한쪽에 겨울옷이 가득 든 가방을 놓아두고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북한으로 가기 전 마음 한구석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모두 풀어야 했습니다. 40여 년 전 우리를 핍박했던 김일성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 나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으로 원수를 용서하리라 다짐했습니다. 북한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기도하는 무거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돌고 나자 굳건한 성이 무너졌듯이 하와이의 섬을 여러 차례 돌며 정성을 들였습니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옛 감정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 부부는 그제야 몇몇 사람에게 북한에 간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229 우리 부부는 마치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 그를 죽이려던 형 에서를 천신만고 끝에 지혜와 정성으로 감동시켰듯이 김일성 주석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실한 부모의 심정이 아니고서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마칠 수 우리는 담담함 마음으로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자 북한 대표가 공식 초청 문서를 건네주었습니다.

 

11월 30일 우리 일행은 김 주석이 보낸 조선민항 특별기 JS215편을 타고 북으로 향했습니다.

 

비행기는 우리를 위해 남편의 고향인 정주 상공을 지나 평양으로 기수를 돌렸습니다. 비행기가 평안도를 지날 때 청천강이 보였습니다. 파란 물결이 마치 손에 잡힐 듯했습니다. 분명 우리 강토이건만 남북으로 갈라져 올 수 없었던 지난 40여 년의 세월이 통한스럽기만 했습니다.

 

평안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남편의 혈육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우리 집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우리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러나 나와 남편은 울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서는 폭포 같은 눈물이 솟구쳤지만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습니다.

 

230 모란관 초대소에 도착했고 남편은 북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했습니다. 나와 남편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다음날 우리 부부는 평생의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영빈관에 감시 카메라가 있었다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울부짖는 그 기도가 모두 녹화되었을 것입니다.

 

아침을 먹고는 평양시내를 들러보았습니다.

 

3일째 만수대 의사당에서 한 연설을 이제 전설이 되었습니다. 주체 왕국인 북한의 심장부에서 주체사상을 비판하고 김일성 주체사상으로는 남북한을 통일할 수 없다.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하나님주의와 두익사상으로만이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되고 전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나라가 된다고 큰소리로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의 상투어가 된 한국전쟁은 북침이라는 주장에 대해 남침이라고 정면에서 통박했습니다.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권총을 허리에 찬 북한 경호원들이 금방이라도 총을 빼들고 달려들 기세였습니다. 동행한 우리 식구들의 손과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나는 남편과 전 세계를 순방하며 각국 정상들을 많이 만났지만 평양 방문 때는 정말로 비장한 각오와 심각한 결의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6일째 되던 날 헬리콥터 두 대에 나눠 타고 정주에 갔습니다. 김 주석의 지시로 도로를 잘 닦아 두었고 양친 산소에 떼를 입히고 비석도 세워 놓았습니다.

 

생가에는 페인트칠을 하고 토방과 마당에 모래를 깔아 새로 단장했습니다. 남편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꽃을 바쳤습니다.

 

231 나의 고향 안주 하늘이 아스라이 바라보였습니다.      

 

* 우리가 북한에 간 이유는 고향에 가고 싶어서도 아니고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을 만나 조국의 장래를 놓고 담판을 지으러 간 것입니다. 그 역사적 소명 앞에서 사사로이 내 감정을 내비쳐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언젠가는 누구나 자유롭게 고향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었습니다.

 

7일째가 되어서야 우리는 드디어 김 주석을 만났습니다. 함경남도 마전에 있는 주석 공관에 들어서자 김 주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관은 하얀 돌집이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김 주석은 서로를 반갑게 얼싸안았습니다. 김 주석은 한복을 입은 나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식가를 하면서 사냥이며 낚시 등 소소한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나눴습니다.

 

김 주석을 이듬해(1992년) 계획된 3만 쌍 국제합동결혼식을 해당화가 아름다운 원산의 명사십리에서 하도록 추천했습니다. 원산항 개항도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할 말이 너무 많아져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 그 시절 북한을 찾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생명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문 총재는 공산주의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종교 창시자인 동시에 세계 제일의 승공 지도자였습니다.

 

232 그런 땅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들어가 최고 통치자에게 천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 우리가 8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평양을 떠나자마자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가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왔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조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