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노정

한국동란(1950.6.25) - 11가지.

true2020 2016. 7. 8. 10:10

▶ 1941.12.7. Pearl Harbor Air Raid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일본은 미국과 소련의 적

 

▶ 1943.11.22. 카이로 회담

- 카이로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공식 논의하였다.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제3항에서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 한국을 해방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 테헤란 회담

-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1943년 11월 28일, 이번엔 중국의 장제스가 빠진 채 이루어진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

 

▶ 1944.6.6. 노르망디 상륙작전 Normandy landings

- 작전 암호명 Operation Neptune

- 독일은 미국과 소련의 적

- 1945.5.7. 독일 연합군에게 항복.

 

▶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미 영 소의 수뇌자 회담 Yalta Conference  1945.2.4.~2.11.

-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 나치 독일 소련 미국 프랑스 영국 등 4개국 분할 점령.

 

▶ 1945.7. 26. 독일의 포츠담에서 포츠담 선언 Potsdam Declaration

- 제13항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

-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았다. 트루먼 , 처칠. 장제스 서명.

 

▶ 1945.8.6. 히로시마. 8.9.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1945.8.14. 일본 항복.

- 트루먼 대통령은 회담 직전 핵무기 개발 성공 비밀 전문 접수.

 

 소련은 일본 제국과의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1945.8.8. ~ 1945.9.2. 일본 제국에게 선전 포고.

- 홋가이도 분할통치를 대일 참전의 요구 조건으로 세우고 있었다.

- 소련은 단지 극동전쟁에서 6일 동안만 참전했다. 그런데 미국은 동맹국과 동등한 지위를 아시아에서 부여하는 실수를 했다.

 

▶ 루스벨트 미국 32대 대통령 1882.1.30.~1945,4,12, (재임기간 1933.~1945. )

- 1945.4.12. 애완견 팔라와 공원을 거닐다 뇌출혈로 사망.

 

▶ Harry S. Truman 1884.5.8.~1972.12.26. 미국 33대 대통령. (재임기간 1945.4.12.~1953)

- 핵무기 공격 명령.

- 미군은 한반도의 38도선 이남을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수립 시까지 다스렸다.

 

▶ 해방과 함께 드리운 분단의 그림자.

* 소련군은 평양에 도착 "자신들은 해방군"임을 강조했다.

* 하지 장군을 비롯한 미군은 점령군이자 해방군이었다.  

- 한국이 일본의 피해국이라기보다는 치안 유지를 위한 감독하고 감시해야 할 나라라는 생각이 있었다.

- 조선 통치의 모든 정보를 일본군으로부터 받았다.

-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하지는 조선 총독부에서 마주 앉았다. 항복 조인식이었다. 조인 문서 5조에는 일본의 문 무관 모두를 유임했다.  

-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총독부 앞에 올랐다.

 

▶ 맥아더 포고령

 

To the People of Korea:

조선인민에게 고함.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 Army Forces, Pacific, I do hereby proclaim as follows: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 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이에 다음과 같이 포고함.

 

By the terms of the Instrument of Surrender, signe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Emperor of Japan and the Japanese Government and by command and in behalf of the Japanese Imperial General headquarters, the victorious military forces of my command will today occupy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일본 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 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 온 무력투쟁을 끝냈다. 일본 천황과 일본국 정부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일본 대본영의 명령과 이를 돕기 위해 조인된 항복문서 내용에 따라 나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Having in mind the long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nd the determination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the Korean people are assured that purpose of the occupation is to enforce the Instrument of Surrender and to protect them in their personal and religious rights. In giving effect to these purposes, your active aid and compliance are required.

조선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 인민은 점령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권 및 종교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목적들을 실시함과 동시에 조선인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법령 준수가 필요하다.

By virtue of the authority vested in me as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 I hereby establish military control over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and the inhabitants thereof, and announce the following conditions of the occupation :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 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으로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그곳의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 조항을 발표한다.

  • Article I 제1조 -  All Powers of Government over the territory of Korea south of 38 degrees north latitude and the people thereof will be for the present exercised under my authority.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 Article II 제2조 - Until further orders, all governmental, public and honorary functionaries and employees, as well as all officials and employees, paid of voluntary, of all public utilities and services, including public welfare and public health, and all other persons engaged in essential services, shall continue to perform their usual functions and duties, and shall preserve and safeguard all records and property.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 Article III 제3조 - All persons will obey promptly all my orders and orders issued under my authority. Acts of resistance to the occupying forces or any acts which may disturb public peace and safety will be punished severely.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 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 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 Article IV  제4조 - Your property rights will be respected. You will pursue your normal occupations, except as I shall otherwise order.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 Article V 제5조 - For all purposes during the military control, English will be the official language. In event of any ambiguity or diversity of interpretation or definition between any English and Korean or Japanese text, the English text shall prevail.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 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 Article VI 제6조 - Further proclamations, ordinances, regulations, notices, directives and enactments will be issued by me or under my authority, and will specify what is requried of you.추후 포고, 포고 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 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Seventh day of September 1945 Douglas MacArthur Commander-in-Chief, United States Army Forces, Pacific1945.9.7.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 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5.12.16.~12.26.

-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

  1. 조선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창조하고 가급적 속히 장구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기 위하여 조선의 공업, 교통, 농업과 조선인민의 민족문화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시책을 취할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2. 조선 임시정부 구성을 원조 및 적절한 방책의 초안 구체화를 위하여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 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공동위원회가 설치될 것이다. 제안서 준비에 대해 위원회는 조선의 민주주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서는 공동위원회에 대표를 둔 두 정부의 최후 결정 전에 미ㆍ영ㆍ소ㆍ중 정부의 참작을 위해 제출되겠다.
  3.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 및 조선 독립 국가 수립을 돕고 협력(신탁통치) 하기 위한 방안을 만드는 것은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및 조선 민주주의 단체의 참여하에 공동위원회가 할 역할이겠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최고 5년 기간의 4개국 신탁통치 협약을 작성하는 데 대해 미ㆍ영ㆍ소ㆍ 중 정부와 공동으로 참작할 수 있게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제출되겠다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 고려 및 남조선의 미합중국 사령부와 북조선의 소련 사령부 사이의 행정ㆍ경제 문제의 영원한 조화를 확립하는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이내에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가 소집될 것이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 이승만 박사 입국.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

▶ 김구 선생 입국.

 

▶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 미군과 소련군이 마주하는 38선.  서로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위해 싸운 동맹이었다.  

 

▶국방경비대 창설 1946년 1월

- 국내 치안 담당.

- 일본 제국의 38식 소총.

 

 

▶ 인민위원회 선거 1946년 11월 대의원 선출.

위원장으로 김일성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 Soviet

소련에서 노동자ㆍ농민ㆍ병사의 대표자가 구성한 평의회. 의회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의회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마을 소비에트에서 최고 의결 기관인 연방 소비에트까지 있었으며 소련의 정치적 기반을 이루는 권력 기관이었다.

 

* 평양 인민위원회 의장 조만식은 신탁통치 반대 이유로 소련으로부터 제거당했다.

 

▶ 헌법제정위원회 구성 1947년 11월

- 북한 헌법의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하다.

 

▶ 조선인민군 창설 1948년 2월.

- 3개의 보병 사단 - 2만 7천

- 북한 정부가 출범하기 7개월 전이었다.

김일성 "조선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 자신의 군대를 가지게 됩니다. " 

 

▶ 1948년 제주 4.3사건

▶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  198명의 국회의원.  

"현 정부는 전국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하는 중앙정부임을 이 또한 선포하는 바입니다" 

이승만 박사 "가능한 지역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

김구 - 남북한 통일 총선거 주장.

중도 우파 김규식 - 단독 선거는 분단이다.

남로당 - 남한의 단독선거 반대.

 

* 이승만 대통령 선출 1948년 7월 20일 한민당.  

 

▶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8월 15일

- 해방된 지 3년 만이다. 

 

▶ 한미 행정 이양식. 1948년 9월

- 미군정이 끝나다.

 

▶ 남조선 인민 대표자회의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

- 비밀리에 개최

- 남한 대표 선출.

 

▶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총선거 1948년 8월 25일

- 1948년 9월 2일 제1차 최고인민회의 개최. 내각 수상 김일성 선출.

 

▶ 1948년 9월 9일 김일성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통치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선포.

- 그들의 공식적 수도는 서울이었다.

- 지금까지 함께 사용했던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공화국기가 올려졌다.

 

▶ 여수 순천 사건 1948년 10월 19일.

-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좌익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 10월 27일 진압. 이승만 정부의 위신이 세워졌다.

- 남로당 지리산을 중심한 게릴라 투쟁.

- 국가보안법 제정.

- 반공사상 강화  

 

38선을 원치 않았던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 북한 내 소련군 철수. 1948년 10월 ~ 12월 말.

- 미군에 대한 압력.

 

▶ 미군 철수.

- 트루먼과 국무성은 철수 반대. 아이젠 하워 장군과 군부는 철수하자는 입장.

- 1949년 6월 말 군사 고문단 500명 남기고 완전 철수.

 

▶ 개성 송악산 전투

- 488 고치.

 

▶ 황해도 옹진반도

-  남한은 전투사령부 설치. 연대급 병력.

 

▶ 38선에서 1949년부터 1950년 6월까지 760 건의 충돌이 있었다.

 

▶ 1949년 3월 김일성 박헌영 홍명의 등 소련 모스크바의 스탈린 방문.

- 김일성의 국토 완전론 주장.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지지와 허락을 받고자 했다.

스탈린 - 남한 내의 저항세력을 더 키워 선동과 분열의 때를 기다렸다.

"남한이 공격해 오면 이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 1949년 3월 17일 조소 경제 문화 군사 원조를 포함한 협정 체결.

김일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단은 우리에게 뜨거운 환영과 만족한 교섭 결과에 대하여 소련 정부와 스탈린 대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조선 인민과의 영구 불멸한 친선 만세. 소련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인 스탈린 대원수 만세"

 

▶ 김구 암살 1949년 6월 26일  - 國葬.

 

▶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장개석의 패망. 국민당은 공산당 마오쩌둥은 양쯔강 도하 작전으로 국민단 정부 난징 점령.

 

▶ 1949년 김일성은 중공에게 한인 부대 요청

약 3개 사단 3만 명. 인민군의 5사단 6사단이 되어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 냉전

- 소련의 베를린 봉쇄 1948년~1949년.

-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다.

- 독일 민주 공화국과 독일 연방 공화국

 

▶ 소련 원자폭탄 실험 성공 1949년 8월

▶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949년 10월 1일

 

▶ 1949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 창설. 12개국.

- 2020년 3월 기준으로 30개국 가입.

 

▶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에치슨.

- Acheson line declaration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 (한반도와 대만은 제외되었다.)

- 미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극동방위선

 

▶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스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에게 극비문서를 보낸다.

"나는 김일성 동지의 불안을 이해한다. 남조선에 대해 하고자 하는 큰 일은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큰 위험이 없도록 일을 조직해야 한다."

"그가 이 일에 관해 나와 상의하고 싶다면 나는 언제든지 그를 만날 용의가 있다. 이것을 모두 김일성에게 전하고 내가 그를 도와줄 용의가 있다는 것을 전하라"

 

- 무력통일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 마오쩌둥 모스크바 방문 1949년 12월 ~ 1950년 2월.

- 스탈린의 70회 생일 축하.

- 중소 우호조약 체결. 상호 방위 조약. 북한 소련 중공의 3각 동맹.

 

▶ 김일성의 소련 방문 1950년 3월

- 스탈린 요청에 따라 극비 방문.

- 스탈린 "이제는 남한을 해방시키는 것을 허락한다" "다만 중국과 상의하라."

- 무력 전쟁 최종 허가.

 

▶ 김일성과 박헌영 1950년 5월 13일 비밀리에 베이징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

* 스탈린(필리포프) "국제정세가 변했기 때문에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동지들의 제의에 동의했다"

* 마오 "마오쩌둥도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동의한다"

 

* 김일성은 북조선이 첫째 군사력 증강. 둘째 평화통일 대남 제의. 대한민국 쪽의 평화적 통일 제의 거부, 셋째 전투 행위 개시. 3단계 계획을 세웠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하였다.

* 마오 "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도와줄 수 있다."

 

▶ 1949년 겨울부터 1950년 봄까지 인민군 각 사단 별로 대규모 기동 훈련 실시.

▶ 1949년 말에 소련의 훈련 고문단에서 1950년 1월부터 50여 명 전쟁 경험이 많은 소련의 작전 고문단으로 교체.

 

▶ 전투명령 1호 하달.

금화 역에 산더미 같이 쌓인 포탄.

3가지 이유로 본 인민군의 백전백승.

1) 국군은 전투 경험이 없다.

2) 25일은 일요일. 농번기. 6월 23일 24시를 기해서 경계를 해제했다.

3) 무기가 빈약하다.

- T34 소련제 탱크 등으로 무장한 인민군에 비해 국군은 탱크가 한 대도 없었다.

 

* 24일부터 25일 새벽까지 최근접 정찰 명령.

* 25일 새벽 4시 기습 남침 - 암호명 "폭풍"

 

▶ 트루먼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집.

- 미국 시간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

- 7개국 참가. "38선 이북으로 물러가라"

- 장면 주미 한국 대사 "우리는 북한군에 의해 까닭 모를 공격을 받아서 고통받고 있다."

 

 한국전쟁 1950.6.25.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면적 10만 32㎢)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2만 2552㎢

* 한반도 면적 - 한반도 22만 2580㎢

 

1948년 12월 소련군 시베리아로 철군

1949년 6월 29일 미군 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

1949년 10월 중국 대륙의 공산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조선인민군의 남침으로 발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1950년 10월 24일 중국군 개입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전투만 멈췄을 뿐이다.

- 29만 명 월북 또는 납북

- 45명~ 65만 명 월남

- 천만의 이산 가정

 

* 인적 손실

▣ 1976.6.20(일) 만민의 해방. 미국. 

087-293 또 한국동란 때에는 250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살해됐다 이거예요. 

 

유엔군 15만 명

한국 230만여 명

북한 292만여 명

중공군 약 18만 명 사망

 

▶ 국제연합 - 93만 3845명

 

1. 대한민국 59만

2. 미국 (해리 s트루먼, 더글러스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 마크 웨인 크라크,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3. 오스트레일리아  4. 영국  5. 캐나다  6. 뉴질랜드  7. 터키  8. 네덜란드  9. 룩셈부르크  10. 콜롬비아

11. 벨기에  12. 에티오피아  13. 프랑스  14. 그리스  15. 필리핀  16. 남아프리카 연방  17. 타이

 

비공식 지원국 - 일본, 중화민국

의료지원국 - 인도,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 공산군 - 106만 6천 명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김일성) 26만,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297만 명 파병

비공식 지원군 - 소비에트 연방(이오시프 스탈린) 2만 6천

의료지원국- 체코슬로바키아

 

 停戰協定 Armistice Agreement

 

* 1050.6.25 開戰~1954.7.27 休戰

 

국제연합 총사령관 Mark Wayne Clark,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최종적으로 서명.

 

* 한글, 영어, 한문으로 작성.

- 내용은 서언,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되어 있다.

 

*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되었다.

- 스위스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 감시위원단 설치.

 

* 북한은 1974년부터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 한국은 6.25의 주된 교전 당사국으로 실질적인 평화협정의 당사라는 입장을 주장.

 

◑ 한국전쟁

*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대한민국 남침 계획을 세운다.


* 1949년 9월 24일 북조선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

 

*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중국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는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조선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이 짓을 무려 48번씩이나 반복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6.25 전쟁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스탈린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고 1950년이 되어서야 남침을 허가하게 되었다.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의 군사 지원은 보류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비교적 간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다.

 

결정적인 군사 지원은 중공의 모택동이 하게 되었고 이 약조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3월부터 스탈린에게 남침을 위한 직 간접적인 지원을 요청하였고 또 이를 승인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미국이 UN 군으로서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래서 김일성의 계획을 반대하였지만 내전을 끝낸 중공의 모택동은 북한의 남침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소련의 승인과, 중공의 대규모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남침에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판단,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했지만 미국과 UN군의 참전으로 통일은 물거품이 되었다.


* 1950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덕천을 거쳐 임시 수도인 강계까지 가는 일이 생겼으나 중공군의 도움으로 12월 6일에 평양을 수복했다.

 

*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한 장본인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최근까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고 1990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재선되었으나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김정일에게 넘겼다.

 

1994년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던 그가 사망하면서 아들 김정일에게 모든 권력을 승계하였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였으나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면서 김일성으로 개명하였다.

 

* 천리마 운동으로 한국 전쟁 이후 피폐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시켰다. 휴전 직후 그는 주체 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하였는데 1980년대 대한민국의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의 주체사상 노선을 받아들인 그룹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 행적, 한국전쟁 배후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6.25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시각과, 독립운동 여부에 대해서는 인정과 불인정하는 시각이 양립하고 있다.

 

기독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뀌었다.

 

* 김일성은 초기에 부모와 목사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기독교 교회에 다녔다. 그의 부모가 기독교 신자였고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 외삼 종조부 강량욱은 모두 기독교 장로교 목사였다. 유년기에 교회에 다녔다는 의견이 있으나 청년기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 외에 김일성이 신앙 활동을 했다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1. 북괴 정권수립 1년 9개월 만에 남침


▣  1987.6.7(일) 본부교회. 부모님을 모시고 본향 땅으로. 

166-269 1948년 9월에 북괴가 정권을 수립해 가지고 1950년 6월, 1년 9개월 만에 남침을 했다는 거예요, 1년 9개월 만에.

 

2. 만일 한국이 통일교회를 받아들였더라면···.  

 

1974.11.14(목) 벨베디아. 참자녀의 날.

074-092 만일 한국이 통일교회를 받아들였다면 한국동란이 일어났겠느냐? 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 그때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에서 전부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을 하는데도 연합군의 보장 밑에서 했기 때문에 미국과 한국은, 연합군과 한국은 자동적으로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의 기독교와 직통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한국이 독립하기 전에 기독교가 통일교회와 완전히 하나됐더라면, 선생님이 무슨 뭐 매디슨스퀘어가든 집회니 이런 것을 지금에 할 것이 아니라 그때에 한국에서부터 해 가지고 전 세계적으로 뻗어 나갔을 것입니다. 메시아는 세계적 무대를 기반으로 하여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면 세계적 기반이 닦아진 그때에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이면 완전히 국가 기준을 전부 다 수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7년 노정이면 세계는 완전히 길을 닦았을 것입니다. 한국이 해방 직후 3년 만에 정부 수립을 선포한 것도 다 그런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1950년 6.25동란은 7년 과정에서 벌어진 싸움입니다. 그거 왜 그러냐 이거예요. 기독교가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투해 가지고 칠 수 있는 기반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 아이젠 하워가 그때 큰 실수를 했다는 거예요. 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만일 그때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레버런 문을 받들어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미국은 문제없다구요. 그때 한국에 기반을 닦고 미국으로 왔으면 미국은 문제없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기독교는 가인적 입장에서 아벨을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세계 기독교를 중심 삼고 볼 때 한국의 기독교는 아벨이요, 한국의 기독교를 중심 삼고 볼 때 통일교회는 새로운 아벨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가 결국 통일교회를 반대했다는 것은 가인적 입장에서 아벨을 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사탄 편으로 돌아갔다는 거예요, 사탄 편으로. 

 

* 그때 맥아더 장군 말대로 했다면 1952년 6월까지 끝난다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7년 만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1945년 이후 7년 만에 한국을 위해서 세계적인 공을 세웠을 텐데도 불구하고···. 한국동란에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군을 투입한 것은 잘했지만 트루먼이 역사적인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3.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군.

 

▣ 1982.9.13(월) 미국. 오, 인천 영화와 오션 처치에 대해. 

- 미국 책임자 

 

119-218 인류의 조국되는 한국을 보호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한국동란에 모든 나라를 동원시켰다는 결론이 딱 들어맞는다 이거예요.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군으로서 희생한 사람들이 한국동란 참전용사들이었다 이거예요. 그거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그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4. 하나님의 성전을 찾기 위한 전쟁.

 

▣ 1982.9.13(월) 미국. 오, 인천 영화와 오션 처치에 대해. 

- 미국 책임자 

 

119-218 자, 그래서 한국동란 당시에 예수님이 공중에 나타났다는 그런 얘기도 뒷받침해 주는 재료들이에요. 그걸 보면 선생님이 말한 내용이 전부 다 맞는 거라구요. 그리고 예수님의 현현과 더불어 한국동란은 하나님의 성전을 찾기 위한 거룩한 전쟁인 것입니다. 또 한국은 섭리의 뜻이 있는 나라로서 여기에 참부모가 나타나면 이상적 조국이 되기 때문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하늘이 모든 민주세계의 기독교사상을 가진 국가를 동원해서 희생시켰다 이거예요. 싸우게 했다 이거예요. 

 

5. 하나님의 계획, 안전보장이사회 소련 대표 불참석.

 

▣ 1993.10.8(금) 제주국제연수원. 종족적 메시아는 예수님의 대신자. 

- 일본여성수련.

 

249-124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어떻게 한국에 유엔군을 참전하기로 결정했느냐? 그때 소련 대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구요. 왜 참가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6. 16개국 

 

▣ 1999.1.2(토) 제16회 애승일 기념예배. 우루과이. 

298-190 오늘이 16회 애승일인데 이 16수라는 것은 탕감 수에 있어서 종말적인 수가 되어 있고 또 시작의 수도 되어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알다시피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국이 16개국이었고 중국의 혼란시대가 16으로 출발했고 한국동란이라는 세계적인 모든 역사를 수습하는 전쟁에 있어서 16개국이 개입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거예요. 

 

1) 사탄의 이상수가 16수. 16수가 문제다.

 

▣ 1992.12.6(일) 벨베디아. 참부모님의 책임 완수. 

239-268 한국동란 때 유엔 16개국이 참전했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서 16개국이 하나되어서 온 것입니다. 제24회 서울올림픽 대회 때도 세계 162개국 가운데서 160개국이 참가했습니다. 16수에 해당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한국이 북한하고 같이 유엔에 가입했는데 공인된 것이 160번째하고 161번째입니다. 그거 알아요? 이래야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수리적인 섭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 1993.10.8(금) 제주국제연수원. 종족적 메시아는 예수님의 대신자. 

- 일본여성수련.

 

249-124 한국동란에도 16개국이 참전했다구요. 16수는 사탄 수의 4의 4배로 이상 수입니다. 여기에 0을 하나 넣은 160수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서울올림픽 대회도 160개국이 참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적인 사건입니다. 

 

* 그리고 한국과 북한이 유엔에 160번째와 161번째로 가입했습니다. 160는 4수의 4배수, 이상 수이기 때문에 사탄권을 대표한다구요. 유엔군의 16개국도 세계의 조국, 인류의 조국을 구하기 위해서 참전했습니다.

 

2) 서구문명을 아시아에 연결하려는 하나님의 섭리. 

 

▣ 1975.6.16(월) 섭리 노정으로 본 우리의 입장. 전본부교회.

- 전국 교역장 집회.

 

079-040 그러기에 하나님의 복귀섭리로 볼 때에 하나님의 섭리는 끝날이 되면 서구문명을 기필코 아시아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몰고 왔던 것입니다. 그래, 그걸 아시아에 연결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피와 살과 몸과 마음과 정성과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안 되었기 때문에 한국동란을 중심 삼아 가지고 16개국에 해당하는 이국민이 비로소 1950년도에 아시아의 접전지인 한국을 택해 가지고 들어온 거라구요. 난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피를 많이 흘린 것은 기독교 문화권이 아시아 문명권과 상봉할 수 있는 하나의 유대를 맺기 위해서인 거예요그래 가지고 공동적인 운명의 유대를 맺어 준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여기서 후퇴하면 미국은 똥칠을 한다 이겁니다. 아시아에서 후퇴하게 되면 미국은 아예 똥칠을 하게 되는 거예요. 월남에서, 크메르에서 전부 똥칠했지요? 

 

* 그렇게 되어 한반도가 적화되는 날에는 일본은 3년 내에 적화된다구요.  

 

3) 유엔 16개국 참전은 민주세계, 세계적 시대까지 나아간다. 

 

▣ 1976.8.8(일) 워싱턴 대회와 우리들의 사명. 벨베디아. 

088-117 그 세계적 과정에 있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는 유엔 16개 국가가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은 한국동란을 통해서 완전히 세계 무대 위에 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 반대하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걸려 들어간다 이거예요. 민주세계 전부가 걸려 들어가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그러한 시련을 개인적 시대로부터 가정적 시대 종족적 시대 민족적 시대 국가적 시대를 거쳐 가지고 세계적 시대까지 나아가야 된다 이거예요. 

 

4) 해와가 16세에 타락. 

 

▣ 1998.11.15(일) 하나님과 자녀의 절대 주인과 소유권 완성하자. 벨베디아. 

297-079 이것은 생축헌납제를 맞이하기 위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유엔이 16개국이 한국동란에 참전했어요. 이것은 4수의 4배예요. 아담 해와가 16세에 타락했기 때문에 그걸 넘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알겠어요.  

 

5) 아담~노아 10대 1600년 

 

▣ 1972.3.24(금) 독일 에센교회. 복귀. 

- 제3차 세계순회노정. 

 

054‐197 한국동란은 북한에서 남한을 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때 민주세계가 한국을 후원하여 북한의 침공을 방지해 주었기 때문에 한국이 승리했던 것입니다. 전쟁에는 16개국이 참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4수에다가 4수를 곱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노아 시대의 1600년에 해당하는 것을 전부 다····.  

 

 

6. 한국전쟁으로 냉전시대 돌입과 1988년 올림픽 중심 삼고 종결.  

 

▣ 1997.9.19(금) 천부주의 완성. 벨베디아.

- 제9회 천부주의 기념예배. 

 

287-125 한국을 중심 삼고 한국동란 때문에 양극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시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올림픽 대회를 중심 삼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회에서 갈라져서 양극이 되었던 것이 한국 올림픽 대회를 중심 삼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 1992.1.1(수) 세계선교본부. 새 나라 통일. 

- 참하나님의 날 0시 예배.

 

225-010 기독교를 중심 삼고 전부가 반대를 하니까 전 세계가 반대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1948년을 중심 삼고 북한 남한에 두 정부가 서 가지고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한반도에서 김일성이가 남한을 침범함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유엔과의 대결이 벌어지고 김일성의 공산권과 민주세계가 대결해 가지고 싸워 나오는 그 싸움이 지금까지 계속해 나온 거라구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양극 세계라는 말은 한국동란으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1992.8.22(토) 서울롯데호텔. 한국 통일과 세계 평화. 

- 제5차 세계평화정상회의.

 

234-239 1950년에 발발된 한국동란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온 세계가 미 소 양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시대로 돌입하는 가장 구체적인 시발점이기도 했지만 실로 한국동란은 세계의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이 참예하게 대립된 축소판으로서 역사의 두 갈래가 되어 온 신의 세력과 악마의 세력이 대결하는 최일선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한국동란은 세계의 선 편을 대신하여 악마의 세력과 싸웠던 성전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냉전시대의 시발 지역인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고는 진정한 냉전시대의 종식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난 19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이 함축했던 의미는 대단히 큰 것입니다. 12년간이나 미소 양 진영이 서로 보이콧하던 올림픽에 처음으로 동서 양 진영이 함께 참석하여 동서 화합의 시발점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유례없이 세계에서 160개국이나 참여하여 전 세계의 화합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1993.10.3(일) 본부교회. 제6회 세계통일국개천일. 

248-297 한국동란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던 냉전시대가 (88서울)올림픽 대회를 중심 삼고 종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 거예요?  

 

* 냉전의 종식이 벌어졌던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유엔 총회에 160번째와 161번째(대한민국)로 남북한이 가입하게 된 것입니다. 

 

248-307 이제는 내가 유엔에 손댈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머니가 유엔에서 연설했지요? 기독교 문화권의 중심이 미국인데 그 미국의 국회와 자유세계를 대표한 유엔을 어머니를 중심 삼고 연결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2차 대전 후에 신부가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이걸 다 찾아 승리해 가지고 기반을 닦아 놓아야만 2차 대전 직후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7. 慰靈祭를 지내 줘야 한다.

 

▣ 1982.9.13(월) 미국. 오, 인천 영화와 오션 처치에 대해. 

- 미국 책임자 

 

119-217 한국동란 때에 참전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 주는 거예요. 그건 앞으로 16개국을 모두를 묶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좋은 재료라는 거예요. 유엔 공동묘지라는 것은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위령제를 지내 주고 그 친척과 그 나라의 장관, 그 나라의 군대, 그 나라의 대통령까지 초대해 가지고 우리가 세계 묶는 데 있어서 좋은 재료라는 거예요.

 

119-218 자, 피를 흘려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그 세계적인 전쟁사는 한국동란 밖에 없다구요. 세계 16개국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 승리를 주장하고 승리를 표방했던 것은 이 지구성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가는 것은 인류 역사상에 처음 있었던 일이라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한다구요. 

 

그것은 한 나라의 내란과 같은 거예요. 또 하나님의 섭리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의 섭리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전쟁도 처음이었다 이겁니다. 그것이 레버런 문과 연결되면 무슨 정신으로 연결되느냐 하면 하늘의 메시아 정신과 연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인류의 조국되는 한국을 보호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한국동란에 모든 나라를 동원시켰다는 결론이 딱 들어맞는다 이거예요. 조국광복을 위한 독립군으로서 희생한 사람들이 한국동란 참전용사들이었다 이거예요. 그거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그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1979.12.30(일) 미국. 섭리로 본 아벨들. 

106-234 한국동란 때 세계의 젊은이들이 피 흘렸던 것이 부활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죽음을 당했다"고 하고 있는데 "하늘의 聖戰을 위해서 제물로 죽었다"고 부활시켜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흘린 피를 누가 거룩한 피로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겁니다.

 

한국동란에서 피 흘리고 죽은 저나라에 있는 거룩한 분들을 해방시켜 주는 운동이 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맺힌 원한은 지상에서 풀어 줘야 합니다. 누가 풀어 줘야 하느냐? 미국 통일교회 젊은이들이 해야 됩니다. 자유세계의 젊은이들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8.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 1950.9.15.

-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다. 

- 공산주의를 누구보다 미워했다. 

 

1982.9.1(수) 벨베디아. 주인, 객, 그 외인. 

119-203 내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들었다구요.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들었어요. 미국의 젊은이들은 맥아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차 대전에 있어서 미국의 의의를 모르고 한국동란에 대한 의의를 모르는 거예요.

 

자,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2차 대전에 대한 의의와 한국동란의 의의 그리고 그 섭리적 의의를 알게 하고 믹구이 폭발될 수 있는 새로운 국민운동이 일어나게 해야 된다구요.

 

그러면 왜 레버런 문이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들었느냐? 맥아더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했느냐? 하나님을 믿었다는 거예요. 인천상륙작전이라는 것은 전략적인 면에서 역사상에 불가능한 거였어요. 조수물이 들어오는 45분 간에 272척을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거라구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그 전쟁을 인류 역사상에 없는 전쟁이라고 보고 하나님의 생존에 대한 문제를 걸고 희생하고 투쟁할 것을 다짐하고 또 그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해방을 위해서 그 작전을 한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했다 이거예요. 그리고 인류를 사랑했습니다.

 

원수 나라인 일본이 30년 동안에 세계적인 경제 왕국이 될 수 있는 기초를 맥아더 장군이 닦아 준 걸 알아야 된다구요. 그다음에는 뭐냐? 그리고 공산주의를 누구보다 미워했습니다. 왜? 인간의 인권과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주의이기 때문에. 그것이 맥아더 장군의 중심 사상 관념이었어요.

 

※ 인천상륙작전

 

- 인천항 간만의 차가 7m.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 성공률이 5000대 1이라고 주장하며 격하게 반대했다.

- 맥아더 "이런 난점이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 "한반도의 노르망디의 기적"

- 1950.8.28 미국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작전 승인.  

- 1950. 9.15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이다.

- 맥아더의 거짓정보 "군산에 상륙할 것이다"라는 정보를 흘렸다.

-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냈다.  

-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다.

- 작전 1단계는 월미도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에 상륙. 2시간 만에 월미도 장악.

- 작전 2단계 국군 해병대 1연대와 육군 제17연대, 미국 7보병사단, 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

-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밖에 안 걸렸으니, 이 작전의 성과는 매우 컸다.

-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9. 한국동란과 일본

 

▣ 1990.7.8(일) 본부교회. 내 나라 통일과 세계 평화. 

204-161 하늘 편 천사장 국가인 미국, 그다음엔 일본, 한국, 이 세 나라가 하나돼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도 한국을 놓으면 큰일나고 일본도 한국을 놓으면 큰일납니다. 그런데 일본이 그걸 몰라요. 본래는 한국동란 때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 대신 죽었어야 됩니다. 

 

1990.7.7(토) 위하여 사는 정신. 본부교회. 

- 6500가정 일본대원. 일본어.

 

205-091 한국동란 때 일본 사람들은 돈을 벌었지요? 한국동란이 없었으면 일본이 이렇게 될 수 없었다구요. 한국동란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일어설 수 있게 되었어요.

 

한국동란 때 일본은 동참 안 했잖아요? "한국은 한국이고 일본은 일본이다." 그러면 안 돼요. 섭리적으로 볼 때 일본은 해와 국가이고 한국은 뭐예요? (아담 국가입니다.) 사실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10. 차든지 덥든지 해야.

 

▣ 1991.1.13(일) 본부교회. 사탄 편 습관성 타도와 하늘 편 질서 확립. 

213-027 기회주의자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예요. 한국동란 때도 기회주의자는 올라가는 놈한테 맞아 죽고 내려온 놈한테 맞아 죽지 않았어요? 그런 것입니다. 끝날에는 차든가 덥든가 해야지 미지근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언제라도 희생되는 것입니다.

 

11. 여자들의 정절.

 

1991.7.14(일) 코디악. 책임분담 완성과 참된 사랑. 

218-147 한국은 예로부터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여자들이 정절을 지켜왔는데 한국동란 때 문란해져 버렸습니다. 생활기반이 없는 피난민이 되어 큰일이 난 것입니다. 얻어먹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할 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일을 할 만한 거리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양에서 온 군인들과 결혼을 해서 정절이 무너져 가고 한국의 가인적인 입장인 그들과의 사이에서 혼혈 아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런 것까지도 선생님이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