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조 金新朝1942.6.2 ~ 목사 인터뷰 / 출처 문화일보 정충신 기자 내용 중. 2010.5.28
- 부인 최정화
- 저서《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김신조 저, 동아출판사, 1994.10.01)
- 귀순 후 서울 침례회신학교(現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후에는 종교인이 되었다.
- 침례교회 성락교회 60여 개 지교회 중 가장 작은 삼봉성락교회 담당
2010년 4월28일 부인 최정화(65)씨와 서울광장에 마련된 천안함 46용사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의록을 남겼다.
“이북에 당했습니다. 북한이란 나라는 테러 국가입니다. 협상이 안되면 마음대로 협박하고 협박이 안 통하면 멋대로 폭력을 가하고 폭력이 안 통하면 살상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대화·협상·교류하는 것이 힘들지요. 전에 제가 강의하면서 앞으로 남북관계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으면 이북은 금강산이며 개성공단이며 다 몰수할 것이라고 했어요.
김 목사는 인터뷰 내내 “남한 사람들이 이북을 너무 몰라 순진하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3월 26일 사건이 터지자마자 북한 김정일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이북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저를 비롯한 특수부대원은 남파 당시 인민무력부(국방부) 안의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이었죠. 지금은 노동당 대남공작 조직을 합쳐 정찰총국이 됐습니다.”
“남파 당시 124군 부대의 정찰국장 김정태는 김일성과 백두산에서 같이 싸웠다는 바로 김책의 아들이었다”며 “이북에서는 북한 해군이나 다른 대남사업 관련 단체는 천안함 침몰 사건 같은 대형 사건은 손을 못 대며 1968년 1월 21일 사태와 똑같이 제가 있었던 부대인 정찰총국 소속 124군 부대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현희 KAL기 폭파, 동해 잠수함 침투,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은 모두 정찰국에서 한 것으로 정찰국은 테러와 살상, 파괴가 전문”이라고 말했다.
“남파 당시 지리산 빨치산이 남한 괴뢰정부를 반대해 봉기를 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도망가면서 삐라(전단)를 서울시내에 뿌렸습니다. 평양 중앙방송에서는 이같은 내용의 대남방송을 했습니다. 청와대 습격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특수부대원들이 사살당하자 북한은 곧바로 자기들 소행이 아니라고 잡아뗐습니다. 날조극이라고 적반하장으로 거짓말하는 것은 북한의 상투적 수법입니다.”
김 목사는 “1·21사태도 북한 김정일이 나중에 시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북한은 도발을 저지르고 난 뒤 설사 나중에 사과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 거짓말부터 하는 일을 반복해 왔는데 남한의 일부 친북단체와 정치인들이 여기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저로선 감사한 게 31명이 남파됐는데 그때 29명이 살상당했습니다. 1명이 살아 돌아갔는데 나중에 탈북자들에게서 별 달고 고위층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혼자 남한에 남게 됐죠. 그때 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저 혼자 살아남은 것은 부친이 지어 준 제 이름, ‘새 신(新), 아침 조(朝)’ 즉, 운명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신앙 생활을 해보니 하나님 모르는 불모지 땅에서 31명이 이곳으로 오게 됐고 유일하게 저 혼자 남에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이 오늘같이 저를 쓰시려고 살려 뒀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무장공비 김신조는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도망가다 가지고 있던 수류탄 중 하나를 꺼내 안전핀을 뽑았으나 불발탄이었다. 그는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생포됐다.“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어 저를 쓰시려고 살아난 것이지 제 이름 때문에 살아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됐다가 올해 3월로 34년만에 모두 개방된 ‘김신조 루트’ 를 최근 가 본 적이 있는지 궁금했다.
“민간단체 등에서 실제 김신조 루트를 궁금해 하며 저를 찾기에 가끔 안내하러 갑니다.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로, 송추 골짜기에서 비봉을 거쳐 청와대 뒷산 북악산 바로 밑 청와대로 이어지는 습격 코스였지요. 북악산이 개방된 뒤 올초에만 여섯 번 정도 갔습니다.”
김 목사는 “청와대 습격 당시 눈이 무릎까지 왔는데 실탄 350발, 수류탄 14발 등 20kg을 짊어지고 낮에는 숨고 밤에 강행군했다”면서 “비봉에 도착했을 때 몹시 지쳐 숨이 찼으며 1월 21일 밤 10~11시에 청와대를 습격해 박 대통령을 살해하도록 돼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공비들은 세검정 골짜기 버스 종점 (지금의 파크호텔)에서 도보로 가다가 청와대 정문을 남겨 두고 수도경비사령부 검문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다. 도망가면서 일부는 세검정, 일부는 북악산을 돌아 호경암에서 전투를 벌였다.
김신조 루트 청와대 뒷산 격전지 호경암 등에는 아직도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천안함 사건 등으로 남북이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올바른 남북관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그가 지긋이 눈을 감았다.
“북한 김정일 독재정권이 말하는 동포· 민족과 우리가 말하는 동포· 민족은 같은 말이라도 속이 다릅니다.
저들에게는 원칙을 분명히 지켜야 합니다. 남북교류는 저들이 우리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합니다.
이북은 우리를 미제국주의 식민지로 보지 주권을 인정 안합니다. 같이 만나더라도 대한민국 주권을 인정한다는 원칙 아래서 만나야 합니다.
남북교류는 그같은 원칙을 세워 놓고 이 원칙을 위반하면 협상을 취소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북에 돈 주고 비료며 식량이며 뭐든 다 주면서 우리 마음대로 못하는 데 비해 이북은 도움받으면서도 자기들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까.”
김 목사는 “1·21사태 이전에 남한은 북한보다 국력이 약했지만 지금은 외교·군사·경제·스포츠 등 모든 면에서 강해졌다”면서 “왜 저들에게 밀리며 주도권을 못 잡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파란만장한 김 목사를 지탱해온 생활 신조가 궁금했다.
“제 신조요. 남파된 뒤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는 제 신념은 제가 과연 김정일, 김일성 죽이려고 북에 갔다가 잡혔으면 지금 살아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해 봤습니다.
그들은 사람 죽이는 데 선수입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려고 온 저는 지금 살아 있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이땅에서 사는 그날까지 목회 활동을 하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것입니다. 건강이 따라 준다면 이 나라 자유수호와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할 겁니다. 자유를 가지려면 안보가 튼튼해야 하고 안보를 얻으려면 정신무장이 돼야 합니다. ”
김 목사는 안보강연을 다니면서 60세 이상 된 예비역들로부터 “당신 때문에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도 고생 많이 했다”는 푸념을 자주 들었지만 그 소리가 싫지 않다고 했다.
“1·21사태를 계기로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돼 예비군 민방위 특수부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군대 유격훈련 등 훈련 강도와 군기가 세졌지요. 하지만 그결과 우리 군대가 강해졌지 않습니까. 강한 군대, 안보가 뒷받침되면서 우리 경제와 외교가 점점 발전했습니다. 반대로 이북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든 것을 얻고 나서 북한의 도발과 살상, 잔인성을 잊어버리고 지내다 보니 지금같은 천안함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김 목사는 “이북에서 천안함 사태를 남한에서 날조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자기네들 입장이 곤란하면 으레 하는 말”이라며 “하지만 대한민국 지도자라는 분들이 이북이 저지른 천안함 사태를 우리에게 부정적인 말로 표현해서는 곤란하며 정전협정을 위반한 김정일 집단도 문제지만 우리 내부에 더 문제가 있다”고 거듭 말했다.
▶ 1·21 사태(-事態)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의 군인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군·경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한 인물로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일반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였으나 1.21 사태 당시 남파공작원이었던 김신조는 이를 북한의 상투적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청샤오허(成曉河) 중국 인민대학 교수는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는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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