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인물

사도 바울 (히브리 이름은 사울)

true2020 2014. 5. 13. 17:18

파울로스(그리스어: Παυλος)는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며 첫 번째 신약성서데살로니가전서(51년경 저술)를 저술한 신학자이다. 이 인물의 이름은 개신교와 천주교가 같이 옮긴 공동번역 성서의 바울로를 공히 사용하려 했으나 개신교와 천주교회의 의견차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동방 정교회공동번역 성서를 따라 바울로라고 칭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에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옮긴 성경에 따라 바오로, 개신교(Protestant Church) 대부분은 1900년 완역된 신약성경전서를 따라 바울로 칭한다.

 

성공회(聖公會, Episcopal Church, Anglican Church)에서는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에 따라 바울로라고 하는데, 바울, 바우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교의를 전하려는 열정으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중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었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울은 지성이 없이 열정만 있는 맹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열정은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가를 구약성서를 근거로 변증하는 지성적인 신앙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파울로스는 후대 기독교의 교리, 역사에 미친 영향이 매우 커서 혹자는 "예수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겠지만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파울로스는 그리스 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 또는 샤울이다. 해외파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은 히브리어 이름과 그리스어 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그리스어 이름인 바울히브리어 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바울로 개명했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몰라서 생긴 것이다. 파울로스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년대는 신약성서 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파울로스는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으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 22:25~29에서 파울로스가 선교 활동 중에 유대 민족과의 충돌로 로마군에 체포되었을 때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파울로스는 사도행전 21:39에서 자신이 타르소스(다소)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엇갈린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바울로 자신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사도행전을 쓴 루가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하튼 파울로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로마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갖고 있다는 파울로스의 주장은 그의 집안이 실력 있는 가문이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에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기독교인은 파울로스처럼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사회적 성공(成功)에 대한 욕구를 정당화하기도 하는데, 정작 파울로스 자신은 자신의 대단한 출신 배경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출신 배경을 오물에 빗댄다.


파울로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 유대 전통에 따라 구약성서(율법, 예언서), 율법 해석(미드라시),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이러한 체계적 신학 교육은 사도 바울을 유대 전통인 율법을 비판할 만큼 뛰어난 신학자로 자라게 해 주었다. 사도 파울로스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 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기원후 5년경? (서기 10-15년?) 길리기아 도읍인 다소라는 고대도시에서 출생

그의 부모는 야곱과 라헬 사이에서 태어난 베냐민 후손. 율법주의의 바리세 파였다. 이스라엘 초대 왕의 이름은 딴 사울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히브리식 교육을 받았다.

  • 32-33년스테파노 부제 순교, 파울로스의 회심
  • 33년-39년요르단강 동부 거주
  • 39년다마스쿠스 탈출, 예루살렘 방문
  • 39년-43년 시리아길리기아 거주
  • 43년-44년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성 바나바와 공동 목회.
  • 44년-49년경 1차 전도여행
  • 49년경 예루살렘 공의회
  • 50-52년경 2차 전도여행.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전서 작성
  • 53-58년경 3차 전도여행,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 작성, 감옥에서빌립보서빌레몬서 집필,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고린도후서 집필
  • 58년 초고린도에서 로마서 집필
  • 58년경 예루살렘에서 체포
  • 58년 이후 로마로로마 이송, 로마 선교
  • 62-63년경 석방되어 스페인에서 선교했을 것으로 추정됨.(로마서 15:28)
  • 역사학자 중에는 사도 바울62년 잠시 석방되어 2년간 고린도 교회, 마케도니아 교회, 로마교회를 돌아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 64년-68년 로마에서 순교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파울로스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기독교인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에 가던 중 예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이후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인이 된 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개종이라는 단어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성 바울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는 독립 종교가 아닌 예수메시아로 믿는 유대교의 소 종파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개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파울로스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나바/바르나바가 자신의 사촌인 마르코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로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 끝에 서로 헤어졌다.

 

사도(apostle)는 '그리스어: απόστολος'를 음역한 것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라는 뜻이 헬라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

사도로서 임명될 자격 중 하나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파울로스는 다마스쿠스에서의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주관적 주장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믿을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 예수로부터 사도로 임명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1세기 교회에서는 파울로스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르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실성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신약성서에서 실제 파울로스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로 서신서는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

  1. 확실히 파울로스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2. 파울로스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3. 파울로스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 에베소서
  4.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5.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

 

 

▣ 1958.10.19(일) 전본부교회. 누가 골고다의 친구가 될 것인가.

004-350 오늘날 기독교인은 바울이 하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바울은 12제자한테 몰렸습니다. 사도라고 하여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바울은 12제자로부터 몰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하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배반한 사도가 아닌, 배반하지 않은 산 사도의 입장에서, 이방 나라인 로마에 가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이 12제자의 순교를 대신하여, 세례 요한의 죽음을 대신하여 주를 찾았기 때문에 땅 위에 있어서는 섭리적인 궤도가 이방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로마 제국에 들어가 혼자 몰림을 받게 됩니다. 종교적으로 환영받지 못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서 정하신 섭리의 뜻 하나를 품고, 인류의 십자가인 골고다의 길을 가신 것과 같이, 로마의 어떠한 핍박의 화살에도 굴하지 않고 꿰뚫어 나아갔습니다. 하늘의 뜻을 위하여서는 죽음도 개의치 않고 나가는 모습이 예수의 모습을 彷佛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을 중심 삼고 기독교는 움직여 하나의 가정형을 가치고, 부족형을 거쳐, 민족, 국가, 세계형으로 나옵니다.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간 것같이 바울이 하늘의 사명을 짊어지고, 12제자 대신 사탄 세계를 대하여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자진해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 네로 황제 시대의 극심한 핍박과 학살의 과정을 거쳐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개인적인 바울의 희생이 그때의 부족들, 또는 12제자와 같은 사람들, 이스라엘과 같은 무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개인으로부터 전체가 하나로 뭉치어 죽음의 자리를 넘어 싸웠기 때문에 로마 나라를 빼앗아 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약 4세기를 지내는 동안 기독교는 번창하게 됩니다. 중세 봉건사회 시대에 있어서 로마 교황청을 중심하여 기독교는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를 기독교인들이 지배해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