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1.1.13(일) 사탄 편 습관성 타도와 하늘 편 질서 확립. 본부교회.
213-007 그렇기 때문에 사탄 세계는 전쟁을 유발시켜 점령해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향해서 가고, 종교권은 화합의 도리를 통해 투입해 나오면서 하나의 세계를 향해서 확장돼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전부 철학사상을 중심 삼고 사상적 체계로서 나타났는데 그것이 사유와 존재 문제, 관념과 실재 문제입니다.
이 2대 사상의 개념을 중심 삼고 지금까지 갈라져 나온 것이 뭐냐? 그 하나가 프랑스 혁명을 중심 삼고 인본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계몽사상을 거쳐 공산주의로까지 나와서 무신론을 중심 삼고 유물론, 물본주의 사상을 중심 삼은 세계 제패를 목표로 확장했던 것이 공산주의 체제입니다.
여기에 반해서 종교 중의 중심인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 삼고 유신론 즉 신은 절대적으로 있다는 개념을 중심 삼고 세계로의 확장과 더불어 세계적인 연합 체제를 갖추어 나온 것이 오늘날의 미국을 중심 삼은 기독교 문화권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유신론적 입장에 서 가지고 하나의 세계로의 팽창 기반인 동시에 하나의 통일적 기반이었습니다.
213-053 중세 시대에서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인본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문제되니까 정교 분립을 해 놓았지만 그게 아니에요. 신정정치입니다. 성경을 보라구요. 구약성서를 보면 선지자들이 왕을 지배했습니다. 그렇지요? 신정 정치입니다.정교 분립, 이것을 우리가 철폐시켜야 됩니다. 그 싸움을 하려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 프랑스 혁명(1789년 7월 14일~1794년 7월 27일)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이다. 프랑스혁명은 엄밀히 말해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의 혁명만을 가리킨다.
이때 1789년의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구제도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평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1789년에 봉기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에게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 동안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의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 역사에서 정치권력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에서 일반 시민에게 옮겨지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7월 혁명 (1830년) : 샤를 10세 타도. 부르봉 왕조의 몰락.
2월 혁명 (1848년) : 부르봉 왕조 대신 왕이 된 루이 필리프를 타도. 프랑스 왕국 종말.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신분(추기경 등의 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면서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신분(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제3신분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175년이나 소집되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왕실의 과도한 지출로 인해 루이 14세부터 프랑스 재정은 휘청이기 시작했고 영국의 미국 진출을 견제하려는 미국 독립 전쟁 참전으로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려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고 루이 16세에 이르러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프랑스 민중의 사회 개혁 의지
제3신분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 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 노동자 노숙인 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장 자크 루소의 공화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하여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혁명 전통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에 기여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에는 부당한 사회체제에 저항할 권리인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다.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결국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표결 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귀족 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하였다.
평민 대표들은 머리수 표결 방식이 채택되지 않자 1789년 6월 20일 회의장을 테니스 코트 건물로 옮기고,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국민의회를 조직하였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3월 24일에는 국민의회에 정치와 결탁하여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던 고위 성직자들과는 달리 민중의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던 로마 가톨릭 사제들과 자유주의 귀족 47명도 합류하였다. 7월 9일에는 제헌 국민의회라 칭하여, 인민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서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년 7월 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7월 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한다. 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8월 4일에 제헌 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제헌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자 부인들을 중심으로 민중들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하여 왕을 파리로 압송하였다.
1791년에는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10월에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당시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푀양당이 입법의회를 주도하였으며 자코뱅당과 지롱드당은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한편 1791년 6월에 국왕 일가는 오스트리아로 도망가려다 발각되었다.(바렌느 사건)
혁명이 프랑스 밖으로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1792년에 이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혁명전쟁을 시작하였다. 전쟁 초기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에게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가들은 국왕과 왕족이 프랑스를 배반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국왕 일가가 머물고 있던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그들을 감금하였다.
한편 혁명 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9월 20일에 프로이센 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제1공화정) 1793년 1월에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1793년 6월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주도하는 자코뱅당는 국민공회에서 지롱드당을 숙청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주적인 새 헌법 제정을 보류하고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혁명 정부를 수립하였다.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켜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상공업자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 9일(1794년 7월 27일)에 로베스피에르를 국민공회에서 숙청하였다.(테르미도르의 반동)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1795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 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은 방데미에르 13일(1795년 10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집트 원정과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총재 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흔히 자유와 평등, 박애라고 알려져 있지만 처음에는 자유와 평등, 권리였다.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도 박애는 거론하지 않았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히어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도 자유와 평등, 안전, 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만을 거론하였다), 1799년 12월 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도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를 인용하였을 뿐 박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 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 정부 헌법에서도 마찬가지다.
혁명과 관련하여“박애”를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 시 집정관 회의이며,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 인간 존엄이라는 천부인권 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 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 박애정신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하겠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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