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노정

1933년 원봉 학원에 들어가 전학 시험 준비. 1934.4.1. 오산 보통학교 3학년 편입 - 1년간 修學

true2020 2021. 12. 20. 17:41

* 1926.~1932. 한문서당 공부 

* 1933. 원봉 학원에 들어가 전학 시험 준비

* 1934.4.1. 오산 보통학교 3학년 편입, 1년간 修學

- 20리 길을 걸어 다녔다. 45분에 간다.

- 오산 보통학교에서는 일본말을 못 하게 했다.

- 독립만세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 일본과 원수의 자리에서 투쟁한 이승훈 씨가 세운 학교.

 

* 1935.4.1. 정주 보통학교 4학년 전학(1938.3.25. 제29회 졸업)

- 일본어 공부를 위해 전학.'적에 대해서 세밀히 모르고서는 적과 싸우더라도 대비책을 세울 수 없다.'

- 가타카나 히라가나를 하룻저녁에 다 외워 버렸다.

- 1, 2, 3, 4학년의 책을 보름 만에 다 외워 버렸다.

- 호롱불을 켜 놓고 공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새벽 2, 3시까지 밤을 새워 공부하면, 어머니 아버지는 ' 야! 잠자라. 몸이 너무 약해지면 안 된다.'라고 했다. 늘 그랬다.

 

* 1938.4.12 서울 흑석동 京城商高實務學校 전기과 입학(1941.3.8 제3회 졸업)

 

▣ 1987.12.4(금) 한남동 국제과학통일회의와 학계의 기반.

- 대학기관 대표자 회의, 곽정환 세계선교본부장, 이상헌 통일사상 연구원 원장 보고 후 말씀.

 

170-304 임자네들 알라구요. 우리 할아버지 형제가 삼 형제라구요. 우리 할아버지가 맨 장손이고 승균이 할아버지가 둘째이고 그다음 셋째는 파주 원전에 계신 분이에요.

 

그 3대를 중심 삼고 보면 둘째는 다 객사했어요. 승균이 할아버지도 풍기에 갔다가 죽었어요. 그러니 승균이 할머니가 남편이 죽어 가지고 돌아 들어왔다고요. 시집이라 해서 들어온 것입니다. 둘째 할아버지가 객사했어요.

 

그다음에는 그 할아버지의 아들들의 둘째도 전부 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내게 삼촌 되는 분이 객사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장손 맏이고 용기 아버지가 둘째 번입니다. 그분도 객사했어요. 나가 가지고 어디 가서 죽었는지 어디 묻혔는지도 몰라요.

 

그다음에는 또 쟤 아버지 되는 익균이, 쟤 아버지도 여기 휘문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죽었어요. 똑같아요.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또 그렇게 됐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러 나가면 죽는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래서 우리도 절대 공부를 안 시키려고 한 거예요.

 

파주 할아버지가 구학문 학자인 동시에 평양 신학 11회 졸업생이에요. 신문학을 다 하고 영어도 잘하는 양반이거든요. 조카들을 전부 다 공부시켜야 될 걸 아는데 할아버지로부터 전부 다 나가면 죽는다고 하니까 못 시킨 거예요.

 

내가 둘째예요. 3대에 둘째 번으로 태어났거든요. 또 승균이도 둘째고 용기도 둘째라구요. 이 3대를 걸고 사탄이 우리 가정을 몰살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 것입니다. 그 기간에 도깨비장난도 하고 뭐 1년에 우리 집에서 다섯이 죽어 나갔다구요. 할아버지가 죽었다 살아나고 이건 뭐 쑥새 둥지가 되는 거예요. 도깨비들이 난동을 벌이는 거예요.

 

▣ 1988.1.2(토) 한남동.

- 흥진님 승화 4주년, 제5회 애승일 기념식.

 

171-252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서는 무슨 말이 있었느냐 하면 말이에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외지에 나가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문중에서 그러한 결론을 짓게 된 것도 그와 같이 둘째들이 머리가 좋아 공부는 잘했지만 나가 가지고 전부 다 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안 시키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 대에 와서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학교에 안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글방이나 다니고 그러다가 내가 철을 알게 되면서 자진해서 개척한 것입니다.

 

자, 이렇게 선생님 대에 와 가지고 보게 되면 둘째 번 아들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을 중심 삼고서 사탄이 총공격하던 그런 시대였다구요. 그 배후에는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 시대를 보면 선생님이 태어나기 3년 전부터 흉년이 들었고, 그 기간은 한국이 일제로부터 나라를 잃어버린 환경 속에서 40년 동안 수난을 받던 시대였어요.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다구요.

 

우리 가정에 있어서는 이미 4대를 중심 삼고 둘째가 맞는 놀음이 벌어진 거였어요. 선생님 대에 와 가지고는 맞지를 않았지만 선생님을 중심 삼아 가지고 또 그런 일이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둘째인 우리 희진이도 객사했습니다. 또 그다음 흥진이도 객사했어요. 우리 혜진이를 보게 되면 둘째 딸로 역시 갔습니다. 언제나 둘째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171-257 학교에 가는 것도 내가 개척했어요. 우리 사촌 되는 키다리, 여기 있나? 용선이? 내가 전부 다 충동질해 가지고 글방에 다니며 1년 동안에 공부를 다 한 것입니다.

 

시골에서는 농사짓기 때문에 벼로 훈장의 수고비를 줘요. 옛날에도 학교 가기 위한 학원이 있었습니다. 서울에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때로 말하면 소학교입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그러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 학원이 있었다구요.

 

그 학원에 가서 공부해 가지고 편입시험을 쳐야 되었어요. 그런 중간 교육기관으로서 학원이 있었어요. 그 학원을 가기 위해서 사촌 동생을 충동질해 가지고 혁명을 한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반대를 하는 겁니다. 할아버지도 "너희들 가면 죽는다"는 거였어요. 그런 過去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환경을 전부 물리치고 학교에 가는 겁니다.

 

학교에 가게 되면 전부 일본말을 배워야 되었거든요. 가타카나 カタカナ 히라가나 ひらがな 를 공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하루 저녁에 다 외워 버렸습니다.

 

학교에 가 보니까 3학년 4학년 5학년 애들이 일본말을 하는데 말이에요, 그때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갔기 때문에 키가 컸습니다. 그런데도 일본말을 한마디도 모르니 그걸 뭐라고 할까요? 남들은 다 춤추고 노는데 그 춤추는 복판에 들어가서 혼자 아무것도 못하고 구경이나 하고 돌아다니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런 셈이었습니다.

 

그때 그 거북했던 것은 느끼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벼락같이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의 모든 책을 그저 보름 만에 다 외워 버렸어요. 그리고 나니까 귀가 트이더라구요.

 

▣ 1990.6.27(수) 3대 주체사상.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

- 경상도 방미 연수단 특별교육.

 

203-277 학교에 가기 전에 벌써 조사를 해 가지고···. 4월에는 학교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는 글방에 훈료, 학비 같은 것을 다 지불한 것입니다. 그땐 훈료라고 했어요. 그 월사금을 다 냈는데 1년도 안 돼 가지고 도망치려니 어머니 아버지부터 설득해야 된다구요.

 

그래, 어머니 아버지 설득하고 할아버지까지 설득한 것입니다. 사촌까지 설득했어요. "남들은 비행기 날리고 있는데 공자 왈 맹자 왈 해 가지고는 안 되겠다." 이겁니다. 전부 내가 개척한 것입니다.